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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구 / 수요시위(水曜示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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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외교협회 작성일17-09-06 13:55 조회2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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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시위(水曜示威)

 

 이경구 전 주센다이 총영사 

 

     창문을 열어 보니, 날이 몹시 흐리다. 우산을 한 손에 들고 대문을 나와 역으로 갔다. 노량진역 옥상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청량리행 열차를 타고 광화문에서 내렸다. 교보문고 뒷길로 해서 중학동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일본대사관 맞은편 보도에 도착해 보니, 어깨에 노란 조끼를 걸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의자에 앉았다. 여성 단체 대표, 일본인, 스님과 수녀, 일반 시민 그리고 기자들도 모여들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는1992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유엔인권위원회에 제기하여, 1996 4월에 일본은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국가 배상을 해야 한다라는 권고를 받아 내었다.

    이윽고 정오가 되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굳게 닫힌 일본대사관 철문을 향하여 팔을 뻗으며 이렇게 외쳤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 배상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일본 정부는 희생자들을 위해 위령비를 세워라!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 정책을 수립하라!’ 할머니들의 얼굴에는 지난해 봄보다 주름이 많아도 목소리는 힘차 보였다. 할머니래야 16명뿐인데 그들 앞에는 전경들이 방패를 들고 버티고 섰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1992 1 8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주도한 시위는 2004 3 17일 수요일 오늘 600회를 맞았다.

    내가 일본군 위안부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시골에서 청주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 2학년에 다니던 해인 1942년의 일이었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머니는 고모가 일본 사람들에게 끌려갔을지 모른다고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고 계셨다. 일본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밥을 해줄 처녀를 잡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고모는 밤이 이슥해서 돌아왔다. 처녀 공출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산에 숨었다고 하였다. 어른들은 일본인 관리들이 동네 처녀를 끌고 가서 군인들에게 위안부로 제공하려 한다고 수군대었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법적으로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및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도덕적 책임만 있는데, 그 책임도 아시아 여성기금으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95년에 아시아 여성기금이라는 것을 설립하였다. 아시아 여성기금에서는 민간으로부터 모금하여 1997 1월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7명에게 일인당 2백만 엔과 총리 편지를 몰래 전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유감의 뜻을 표하고, 일본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한1996 4월 유엔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자발적으로 시행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피해자 할머니와 시민 단체들도 일본 측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 9 8일에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 조약 제4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면제한다는 조항이지 않은가. 청구권 협정에 이런 조항까지 있는 것을 보면,  일본 정부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이 지은『回想  30, 韓日會談』이라는 책에는 청구권 협정에 일본 정부의 책임 면제 조항이 들어가게 된 데 대한 언급이  없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입은 인권 침해의 구제는 재산권 문제를 다룬 청구권 협정과는 별개의 일이다.

    내가 일본 정부의 책임 면제 조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던 이듬해인 1966년에 옛 버마 주재 총영사관에서 부영사로 일하던 때였다. 재외 공관에 처음 부임하여 공보 업무를 맡아 보게 되었다. 날씨가 서늘한 어느 겨울날 저녁에 신문사 기자들을 랑군 시 프롬 가18번지 B의 집에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게 되었다.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으니 화제가 한일 국교 정상화로 모아졌다. 내가 일본 정부의 책임 면제 조항을 꺼내자, 기자들은 자기네 나라가 일본과 맺은 배상 협정에도 그러한 조항이 있다고 말하고 국민의 배상 청구를 막는 협정에 굴욕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랑군에는 한국인 위안부들(comfort women)이 있었는데, 귀국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우리 정부가 청구권 협정 체결 교섭 때에 일본 정부의 책임 면제 조항을 간과하게 된 원인은 어디 있을까. 온고지신(溫故知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인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을 읽었서야 했다는 소리다. 병자수호조약 제1관은  조선은 자주 국가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朝鮮國自主之邦 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라는 것이다. 이 조문을 두고 국사책에서는 그것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 한국사 연구가인 가타노 스키오(片野次雄) 씨는『李朝滅亡』이라는 책에서 자주 국가라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조선 측은 조약 문안의 내용을 논할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고 하지만 조선 측은 사정에 어둡고 다부지지 못하였다. 조선 측 당국자들은××××××.

        이때에 일본은 청국과의 종속 관계가 끊어진 조선을 언젠가는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원대한 심모(深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후 조선의 불행은 바야흐로 병자수호조약의 말 한 마디로부터 시작되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세인의 주목을 크게 받게 된 것은, 내가 일본 센다이(仙臺) 주재 총영사관에 공관장으로 근무하던 때인 1990 5 18일에,  한국 여성 단체들이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진상 규명과 사죄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국 여성계가 연대하여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준비하고 있던 최호중 당시 외무부 장관은,『外交는 춤춘다』라는 회고록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게 된 경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국내 분위기를 야나기(柳健一) 주한 일본대사에게 알리고 사전조율(調律)을 한 결과, 일본측이 최종적으로 제시한 일황의 사죄 문안은  일본에 의해 초래된 불행했던 시기에 한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고 통석(痛惜)  ()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야나기 대사로부터 이것이 확정된 일본측 최종 문안임을 확인한 후, ‘통석의 염이란 잘못을 아픈 마음으로 뉘우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이에 이의가 없느냐고 물었다. 야나기 대사는 그런 뜻으로 해석해도 좋다고 양해했다.”

 

     이 글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대화법에 관한 것이다. 나는 지은이가  통석의 염풀이는 일본 대사가 하도록 해야 하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통석의 뜻에 대한 것이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몹시 애석하게 여김이다. 일본어 사전인 『廣辭林』에는 ひどくしがること(몹시 아까워함, 몹시 애석해함). はなはだ遺憾うこと(매우 유감으로 생각함)”라고 씌어 있다. 다른 사전인 『廣辭苑』에도 그렇게 씌어 있다.

    일본 천황은 5 24  노태우 대통령을 위한 궁중 만찬에서 통석의 염이라는 말이 담긴 연설을 하였다. 당시 외무부 장관의 『外交는 춤춘다』에 보면, 지은이는 통석의 염을  아픈 마음으로 뉘우친다고 풀이하기보다, 뼈저리게 뉘우친다고 해석하는 것이 알맞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적고 있다. 지은이는 이어서 노 대통령을 수행한 공보 수석 비서관과 협의해서 통석의 염이란 뼈저리게 뉘우친다는 뜻이라는 공식 해석을 밝히자 일본 당국이나 언론에서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 언론에서는 이를 거세게 비판하고 나섰다.”라고 덧붙여 적고 있다.

    이상옥 전 외부부 장관은 『전환기의 한국외교』라는 회고록에서 일본 천황의 궁중 만찬 연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일본 천황 연설문에는 통석의 염이란 말이 들어 있는데, 회고록에는 그 말의 뜻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일본 천황은 노 대통령을 위한 궁중 만찬회에서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들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痛惜)의 ()을 금할 수 없다고 사죄 발언을 했으며······. 일본 천황의 사죄 발언에서 사용한 통석의 염이란 표현에 우리 국내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그때까지 한국에 대한 일본 천황의 사죄 발언 중 가장 구체적인 발언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아동 문학가이자 말글 운동가인 이오덕 님은 『우리글 바로쓰기 2』라는 책에서 통석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며칠 전 일본왕의 인사말에 나온 통석’(痛惜)을 두고 신문들이 한차례  떠들썩했다. 그 말이 일본에서도 안 쓰는 죽은 말이라고도 했다. 내가 알기로는 중국글자말을 즐겨 쓰는 일본인들이 더러 쓴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안 쓴다.

    안 쓰지만 중국글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사전을 찾아볼 것까지도 없다. 痛은  매우란 뜻이고 惜은 아깝다란 말이다. 이걸 두고 우리 정부에서(일본인들도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는데) ‘마음 아프게 뉘우친다고 해석해서 보도하게했다니 참 너무너무 한심하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고령이어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 지난달에는 경기도 광주시의 나눔의 집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일본의 사죄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인권위원회서만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을 촉구할 것이 아니라, 어서 일본 정부에 문제 제기를 직접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피해자 할머니들의 외침은 커지는데도 일본대사관의 철문은 열릴 줄을 모른다. 시위 현장을 뜨려니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와락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2004. 12〈지구문학〉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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