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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남 / 치매 아내를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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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07-21 13:55 조회1,0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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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아내를 보내면서

 

박창남 전 주가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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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철쭉, 연산홍 등 백화가 만발한 4월 하순 어느 아침에 햇수로는 61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먼 하늘나라로 떠나가버렸다.

 

生老病死라는 말을 알고 있었는데, 이때처럼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면 돌아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본 적은 없다.

 

2008년 봄부터 건망증이 조금씩 심해져, 방금 얘기한 말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 집을 나가 택시를 타고 마음 내키고 생각나는 대로 가다가 행선지를 모르기 때문에 택시기사가 파출소로 데려가서 내려놓고 순경아저씨가 택시요금을 지불해주면 그곳에 몇 시간이고 머물게 되고 난리가 난 집에서는 기다려도 안 오니 파출소로 신고하고 몇 시간 만에 소재지를 알게 되어 데려오기도 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되풀이 되면서 건망증이 너무 심하다고 해서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 보고 알츠하이머(alzheimer)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 선생의 처방에 따라 아리셉트(Aricept) 정을 복용하기 시작하니 병이 치료되지는 아니해도 많이 나빠지지는 않게 되었다.

 

알츠하이머병은 독일의 정신병의학자 Alzheimer가 1907년 치매(痴?)에 걸린 51세의 여자를 관찰하고 4년 6개월 동안 입원 후 사망하자, 그녀의 뇌를 현미경으로 검사하여 뇌신경을 메우고 있는 아교성 물질이 반점으로 변하고 뇌신경세포가 위축되어 많이 사멸되어 있음을 알게 되어, 노인치매병과는 달라 이것을 그의 이름을 따서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이 병은 보통 50~60대에 일어나는 것인데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70~80대에도 걸리고 또 노인치매와는 달리 유전적 소인이 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서글프고 그렇게 똑똑하고 깨끗하고 기억력 좋던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멍청해지고 바보같이 되나 싶으니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수십 년 전의 과거사는 비교적 세세하게 또 정확하게 기억하고 얘기도 하니 어떤 때는 병이 나았는가 하고 의아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의사선생의 말에 따르면 과거사는 잘 기억해도 조금 전에 생긴 일은 잊어버리는 것이 이 병의 문제라고 하는 설명을 들으니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런 지난 날의 좋은 얘기나 추억을 일깨워주는 노래가사나 얘기를 되풀이해 들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우리가 흘러간 시절에 많이 불렀던 노래나 동요 같은 것을 함께 외우고 부르고 하면서 이를 되풀이 하는 것이 그나마 하나의 낙이고 일과처럼 되기도 했다.

 

가장 많이 함께 부른 동요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토끼로 찍어내어 옥토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지어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하는 보름달 보고 부르는 동요였다.

 

때로는 아주 어릴 적에 부른 일본 가요나 시 구절 같은 것을 함께 외우고 부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지능지수는 5~6세 어린아이 정도로 떨어져 갔으나 내가 하는 얘기 뜻은 잘 이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도 참을 수 있었으나,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방금 한 얘기를 잊어버리고 엉뚱한 말을 하니 참기 힘들고, 또 한 가지는 웃는 것, 미소 짓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아무리 웃을 얘기를 해주어도 웃기는커녕 멍하게 있으니 사람 속이 다 탈 지경이 되고, 치매가 암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병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다가 지난 해 추석 때부터 신체의 다른 부위에도 문제가 생겨 병원신세를 지게 되어 A급 병원에서 B급 또는 C급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거의 8개월 정도 되어 세브란스 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야말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병세가 위독하여 병석에 누워있어도 살아있는 경우와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천양지차가 있으며, 옛 말의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말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아내가 떠나고 세월이 갈수록 지난날의 일들, 그때 그 시절의 일들 특히 해외생활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더욱이 아내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이라도 적어본다.

 

1955년 말,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끝난 다다음해에 부산 백화당에서 결혼하고 2015년 4월 하순까지 함께 살았으니 거의 60년이 다 되는 셈이다. 그동안 1950년대 자유당시절 가족동반이 안 되던 서독근무기간을 제외하고 미국 워싱턴, 서독의 함부르크, 홍콩, 남미, 에콰도르의 끼토(Quito), 아프리카 가나의 아쿠라(Acura)에서 그야말로 신고산도, 헌신부난(獻身赴難)이란 말로 표현되던 시절의 외교관 생활을 항상 옆에서 묵묵히 도왔다.

 

1960년 9월에서 2년간 근무한 워싱턴 시절은 격동의 시기였다. 4·19 혁명 이후 장면정부가 들어서면서 종래의 대미일변도 외교에서 범중립국외교로 전환되고 당시 대사관의 고광림 공사는 하루에도 2~3개 중립국공관을 방문 외교관계수립 교섭을 추진했으며, 이어 5·16군사혁명 후에도 이 정책은 계승되어 그 노력은 배가 되었다. 자유당시절에 이어 주미대사를 다시 맡게 된 정일권 대사는 중남미제국과의 외교교섭에 서반어가 필요하다 하여 아침 8~9시 한 시간동안 서반아어 특강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아내는 공관장 부인을 대신해서 최고위급 부인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당시 워싱턴의 아파트 임대료나 생활비는 미화 400불 정도인 봉급으로는 힘든 상태였으나 그래도 외교관 체면을 유지하려고 Conn. Ave.의 ‘brandywine’이나 ‘4600’에 거주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앞서 말한 대중립국 외교의 덕택으로 친근해진 인도네시아대사관의 Nugrobo 공사와 United Arab Republic의 A. H. H Makhlouf 1등서기관, 가나의 Amon Nikor 1등서기관 등은 후일 콜롬보플랜 가입, 유엔외교 등에서 이들의 협조와 도움을 받게 되는데 외교관생활에서 인관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실감한다.

 

짧은 국내근무를 끝내고 1964년 7월에서 1968년 4월까지의 서독 함부르크 근무시절은 내 젊음과 청춘의 정열을 쏟은 시기였다.

 

군사정부에서 경제외교 일원화(一元化)시책을 추진하면서 서독주재 경제기획원 직원 2명, 상공부 상무관, 조달철 구매관 총 4명을 철수시키고 대신 외무부에서 그들이 하던 일을 떠맡아 하게 되어 다시 다망하고 고달픈 일이었으나 의의 있는 임무라 믿고 동분서주한다.

 

이 시기에 아내는 우선 함부르크 대학에 나가서 독일어 연수를 해서 당시 뉴욕에 이어 세게 제2의 영사단(71개국)에서 보람있는 나날을 보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4년 동안 푼푼이 나 모르게 모은 돈으로 귀국시에 자신과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Steinway Piano 한 대를 구입했던 일이다.

 

1968년에서 1971년까지 국내근무 후 홍콩 근무는 그저 바쁘고 또 바쁜 나날이 오가는 소위 VIP에 시달리는 시절이었으며, 국내 고위층의 특별용품 조달, 수출증대노력, 중국대륙정세를 알기 위한 중국어공부 등이 생각난다.

 

1974-77년의 에콰도르 근무시에는 수출증대노력과 더불어 UN 총회에서의 한국지지 한 표가 우리나라의 주권수호와도 같다는 각오로 일하던 시기였다.

 

당시 에콰도르의 한 표는 제30차 UN총회 제1위원회에서 기권표를 총회에서 찬성표로 바꾸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체면을 세웠다. 이 한 표 얘기는 아내의 각별한 노력이 큰 효과가 있었으며 그 얘기는 필자가 “외교”지 제2호에서 이미 상술한 바 있다.

 

아내는 끼이토 주재교민 부인들과 같이 우리나라의 특산품 바자를 열어 교포사회를 융합시키고 이익금 미불 약 2만 달러를 교민회관건립기금으로 상게하고 동시에 주재국 고아원에 황소 한 마리를 기증함으로써 끼이토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근무한 곳은 가나의 초대 대사였는데, 함부르크 총영사관, 에콰도르 대사관을 위시하여 세 번째의 공관창설이었는데, 그 어려움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으나, 북한과 대치공관이었던 가나의 경우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그 만큼 아내와 당시 미리 부임해 있던 K참사관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사실 이곳 근무는 아세아의 모국과 택일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나, 1957년 Black Africa에서 ‘엔 쿠르마’ 대통령 덕택으로 가장 먼저 독립한 나라이기에 아프리카 경험도 할 겸 필자는 자청해서 이곳 근무를 택하고 미국무성 발간 자료들을 꼼꼼히 공부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West Africa Airway로 Acerq공항에 내리니 교포 수십 명이 나와 있었는데 수도에서 50km쯤 떨어진 Tema항에 기지를 두고 있는 5개 원앙어업회사 직원 둘이 크게 반기던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호텔에 임시 사무실을 두고 공관물색 중, 북한대사와 마주치기도 했으나 좋은 곳을 선점할 수 있었고, 또 이곳 근무 중 주재국에 군사 Coup d’ Etat가 나서 필자가 신임장을 제정한 Akupo 대통령은 시해되고 대신 군사정부가 들어섰으나, 얼마 안 가서 총선거 결과 제네바에서 귀국, 입후보한 외교관이 대통령이 되어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새나라 자동차 20대, 농기구 30대 기증, 태권도 사범 파견 등도 있고 해서 더욱 긴밀해졌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10·26사태가 얼마나 최규하 대통령에 이어 전두환 대통령이 들어와 필자는 30년 가까운 외교관 생활을 끝내게 된다.

 

약 15년에 걸친 해외생활에서 생각나는 일을 무엇보다도 아내는 주재국 언어공부에 애썼으며, 예를 들면 함부르크에서는 Hamburg대학에서 독일어를, 홍콩에서는 中文大學 선생을 초청하여 普通語를, Quito에서는 Katholic 대학에서 서반아어를 공부하여 주재국 적응이 빨랐다.

 

그리하여 주재국 인사의 부인들과의 접촉을 긴밀히 해나갔으며, 특히 에콰도르에서는 그 효과가 컸다.

 

해외생활에서 차치하기 쉬운 아이들의 교육문제도 교포아이들을 포함해서 외국에서는 국어일기 쓰기를 권장하고 반대로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영어일기 쓰기를 계속하여 애써 배운 것을 잊지 않도록 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의 혼기가 되니 며느리 감을 알아본다고 직접 모 여대의 문전에 자리잡고 마음에 드는 학생을 잡고 대화를 시도하다보니 모 대학의 교수 여식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장남의 며느리는 모 대학 학장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하나 더 생각나는 것은 첫 아기를 가졌을 때, 하도 먹을 것을 이것 저것 요구해서 여소처럼 우선 먹고 싶은 것이 3,600가지나 된다고 농담을 했는데 막상 세상 떠날 때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갔으니 눈시울이 뜨거워질 따름이다.

 

각설하고 혹시 독자의 참고가 될 수 있을지 몰라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몇 가지 더 적어둔다.

 

일반적으로 노망(老妄)이라고 함은 의학용어가 아니며 노년치매(老年痴?)라 해야 할 것이며 이는 뇌가 노화하여 뇌 조직이 위축되고 지능이 현저하게 떨어져 저하된 상태라 할 수 있다.

 

80세 이상이 되어 치매에 안 걸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 하겠다. 치매 안 걸리고 건강하게 살려면 운동, 독서, 바둑, 장기, 일기쓰기 등을 꾸준히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노망과 치매는 똑같은 것이 아니며, 노망은 뇌가 노화하여 일어나는 생리적 현상이고, 반면 치매는 똑같은 뇌의 노환현상이라도 병적인 중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양자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치매의 원인은 뇌혈관 장애, 감염증, 신체의 영양부족, 독물의 침입, 외상, 다른 질병, 예를 들면 알콜중독, 강경변, 고혈압, 당뇨병 등에 의한 2차 감염, 뇌세포의 변성인 알츠하이머병, 파킨슨씨병에 의해 발생하며, 현재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씨 병을 제외한 경우는 모두 예방과 치료가 상당히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 인간의 몸에는 약 60조가 되는 세포가 있으며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면 하루에도 평균 9억 개 정도가 죽어 간다고 한다. 이것은 신체가 노화된다는 얘기이며, 뇌도 예외가 아니며, 60세를 지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억력이 감퇴되고 사고력도 조금씩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창작생활을 하는 사람, 경제인, 정치가, 지휘자,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 이를테면 바둑이나 장기를 둔다든가, 가위질로 원예를 한다든가 하는 사람은 치매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융통성이 없는 성실한 사람, 게으른 사람, 무기력하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치매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어떻든 뇌의 노화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일에나 적극성이 될 피리요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노후의 생활설계를 잘하여 항상 배우는 자세로 머리를 써야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치매예방과 관계가 깊은 음식이나 종합비타민 섭취를 거르지 말고 치매예방에 가장 중요한 소금 섭취를 줄여야한다고 한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가끔 건망증이 일어나고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으나, 그럴수록 미리 미리 건강검진을 해보고 규칙적인 생활과 음식물 섭취에 유의하여 “사서삼경 다 읽어도 미리 예(豫) 字가 더 중요하다”는 속담의 뜻을 되새기고 이른바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높일 것을 당부코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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