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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남 / 新年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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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07-21 13:53 조회8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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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年有感

박 창 남

전 주가나 대사

 

새 마음 새 뜻으로 새 희망의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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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2015년! 을미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된 지 70년, 광복 7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신음하고 억눌려서 지낸 사람들에게는 해방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고, 조국의 주권회복을 염원하고 투쟁한 사람들에게는 광복이라는 말이 더욱 실감나는 말이 될 것이다.

 

어떻든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우리나라가 해방된 그 날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는 말 밖에 없을 것 같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한 것이 36년임에 비해서 그 두 배 가까운 70년을 맞이하면서도 아직도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세계 제2차대전 후 유일한 분단국가가 되어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으니 생각할수록 원망스럽고 원통하다.

 

각설하고 해방 전후를 살아 온 사람으로서 생생하게 생각나고 체험한 일들을 그때 그 시절을 되새겨 보고자 하는 분이나 또는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생각하여 두서없이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기로 한다.

 

1919년 을미년 3?1 독립운동 후에 우리나라의 초등교육기관은 간이학교라 불리는 2년제 학교가 있었고 보통학교라 불리는 4년제 학교와 6년제 학교가 있었다. 입학연령은 7~9세이며, 간단한 구도시험을 치르고 입학이 허가되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다.

 

6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면 상급 학교는 고등보통학교(보통 ‘고보’라고 했음) 또는 여자고등보통학교(여고보)이며 무척 어려운 시험을 거쳐야 입학이 가능했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학교마다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입학정원이 대개 100~150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시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3년제(전쟁말기에는 2년제가 됨) 각종 전문학교로 가야했다. 정규대학은 대학 예과 2년이나, 고등학교 2년을 거쳐 4년제(이것도 전쟁말기에는 3년제가 됨) 대학으로 가야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이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부득이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내지(內地)라고 불리는 일본으로 가야했고, 연락선과 현해탄(이북으로 간 林和의 ‘현해탄’시가 유명했음)에 얽힌 얘기나 노래가 많은 것도 일제식민 하에서 신음하면서 해뜰 날을 염원하던 우리 겨레의 실상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전쟁말기인 1945년이 되면서 미군은 유황동(硫黃島), 사이판 섬에 이어 오키나와 섬까지 점령하게 되니 일제의 패섹은 짙어만 가고 미 공군기(구라만전투기)가 한반도 남해안까지 날아오게 되었다. 그 무렵 항간에서는 흰 옷을 입고 손을 흔들어 주면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일본군이 1931년 9월 18일 선양 북쪽 류타거우에서 고의로 철도를 폭파하여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만들고 이어 1937년 7월 7일 북경 근교 盧溝橋(Marco Polo Bridge)에서 중국군을 고의로 공격하여 이른바 북지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을 침공하고, 끝내는 1941년 12월 8일 진주만(Pearl Harbour)을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개전 초기인 1941년 12월 25일에는 홍콩, 1942년 2월 15일에는 싱가포르까지 점령하고 이어 인도네시아 등을 점령하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만든다고 떠들었다. 이 무렵 말레이시아에서 가져온 천연고무로 만든 조그마한 공을 어린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의기양양했던 당국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러나 전시하의 우리나라는 전국 13도에서 생산되는 미곡 평년작 3,400만 석 중 1,600만 석을 내지라고 불리는 일본 본토로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모아 싣고 가고, 그 대신 만주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콩깨묵을 가져와서 먹게 했으니 정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미곡뿐만 아니라 놋그릇까지도 전쟁말기에는 강제로 공출시켜 총탄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요즘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강제징용이나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끌고 간 위안부도 이 무렵의 일이며,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도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비행장 건설공사에 동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으로 처음에는 지원병제도로 시작하여 우리 젊은이를 전쟁터로 끌고 가더니 나중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많은 젊은이가 일제의 희생이 되었으며 필자도 전쟁이 6개월 정도만 더 계속되었더라면 아마 일선까지 갔을런지 모른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죽창을 들고 미군과 결전을 치루겠다고 떠들던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고 우리는 해방되고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닌지 모르겠다.

 

1945년 8월 17일 당시 다니던 학교(진주사범학교)에 나가보니 수학을 가르치시던 강상천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물감으로 태극기를 그리고 있으면서 우리 태극기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정말로 감개무량했다.

 

다음날 시내에 나가보니 조선인민공화국 수뇌부가 결정되었다고 몇 군데 벽보가 붙어있었다. 필자의 그 당시 일기장에 의하면 대통령 김구, 수상 이승만, 內相 안재홍, 陸相 김일성, 海相 여운형 등으로 되어있다. 이 같은 결정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발표했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그 당시 여운형 선생과 공산당관계자들이 한 일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아직도 그 眞相은 잘 모르는 일이다.

 

그해 12월 모스크바 三相회의에서 우리나라를 5년간 신탁통치 후, 독립시킨다는 보도가 나오자 조국의 독립을 갈망해오던 나라는 反託을 외치면서 난리가 났다. 나중에는 공산당을 비롯해서 좌파는 贊託을 외치게 되고 반탁과 찬탁으로 우익과 좌익이 갈라지고 우익은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좌파는 남산공원에서 모임을 갖고 좌?우파 간의 충돌, 난동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과 소련 두 나라에 의해 그어진 38선이 우리나라를 두 갈래로 갈라놓았지만 남?북한 간의 인적, 적어도 물적 왕래 교류는 6?25전쟁 전까지는 이뤄지고 있었으며, 우편물 교환도 6?25전쟁 나기 약 3개월 전까지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평양이나 38선 이북에 집이 있었던 대학예과 친구들이 방학 후 서울로 돌아와서 들려주는 이북 얘기를 흥미롭게 들을 수도 있었다.

 

더욱이 주목할 만 한 사실은 “상품의 힘은 총알 보다 강하다”는 말과 같이 체코슬로바키아제 담배라이터가 서울에도 있었다는 것이 이 무렵의 일이다.

 

1945년에서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그야말로 한반도는 매일 매일이 격동의 시간이었다.

 

남?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1946년과 1947년 두 번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고, 이어 정판사 사건, 여순반란사건, 제주도 4?3사건, 古下 송진우, 雪山 장덕수, 夢陽 여운형, 白凡 김구 선생 이른바 四巨頭의 암살사건 등 자고나면 어리둥절할 사건들이 많았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48년 5월 10일에는 유엔감시 하에 처음으로 남쪽만의 단독 총선거(후보자 이름과 이름 위에 막대기 수로 후보자를 알게 하는 이른바 막대기 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를 구성, 7월 17일에는 대한민국헌법이 제정되고 또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를 선출함으로써 8월 15일 미군정은 끝나고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탄생한다.

 

그러나 2년도 채 못가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국토의 80% 이상이 폐허가 되어 그 참상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아프리카의 최빈국이나 아프가니스탄 상태와 다를 것이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 후 4?19사태를 거쳐 5?16 혁명이 일어나고, 기아선상에서 헤메이는 온 국민의 굶주림 해결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각종 각급의 정책추진과 이에 호응한 온 국민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누가 뭐라 해도 경부고속도로 건설, 인천항만건설,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를 위시한 많은 사적의 보수, 복구, 새마을운동, 포항제철과 정유공장 건설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이뤄지고 우리의 삶은 눈부시게 향상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각설하고, 해방 후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말들 중의 하나가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 믿지 말고 일본 일어나니 조선사람 조심하라”고 했는데 어쩌면 앞서 말한 백의(白衣) 입고 손 흔들면 비행기 날라와도 피해 없다고 한 말과 같이 이는 대륙쪽(중국?)에서 들은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방 후, 지금까지 여러 말들이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는데 생각나는 대로 몇 개만 적어본다. 이를테면, 사바사바, 유전무제 무전유제, 코리안타임, 빨갱이(여기에는 토마토 빨갱이, 사과 빨갱이, 수박 빨갱이가 있음), 꿀꿀이죽, ‘못살겠다 갈아보자’ 등을 연상해보면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고달팠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생각나는 김에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년호나 화폐단위 얘기도 살펴보자.

 

해방 전에는 일제의 기원 몇 년과 소화(昭和) 몇 년이었고, 8?15 해방 후는 서기 몇 년을 1948년 8월 15일까지 사용했다. 정부수립 후는 단기 42xx년을 사용했고 5?16 군사혁명 이후에는 다시 서기를 사용하게 되니, 우리가 이력서 한 장 쓸 때마다 특히 생년월일을 쓸 때 착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필자가 아직도 보관하고 금전출납부에 의하면 1942년 당시 대중목욕탕 가격이 7전(錢)으로 되어있는데 지금 서울의 목욕탕 값이 7,000원이니 계산해보면 몇 배쯤 될까 하고 계산해본다. 7전, 70전, 7원, 70원, 700원, 7,000원으로 무려 10만 배나 되는 셈이고 더욱이 6?25 전쟁과 5?16혁명 후에 두 차례에 걸쳐 1/10 평가절하 하는 화폐개혁이 있었으니, 화폐단위 상으로는 목욕 가격이 1,000만 배나 오른 셈이 된다.

 

또 우리나라 국민의 Per Capital GNP는 지금 21,000 미불 정도라고 한다면, 1954년의 Nathan Report에 의하면 70 미불(당시의 공시환율과 暗시세는 2배였음으로 실제로는 35불인 셈임)이라 하니 대략 600배로 우리 국민의 수입이 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목욕 가격이 1,000만 배, 생활수준이 600배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생각나는 김에 꼭 반세기 전의 일이니 1인 공관장 얘기도 적어 둘까 한다.

 

오늘날 우리 외교관에게는 꿈같은 얘기가 되겠지만 1964년에 짧은 기간이나마 필자가 직접 경험한 일이기에 적어 본다. 지금 80~90년대 사람이 우리나라의 옛 그림, 특히 농촌의 그림을 그려본다면 그것은 아마 단군할아버지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지면 집에 돌아와서 잠자고 집은 나무, 돌, 흙과 지푸라기를 재료로 지은 것이고 물은 공동 우물에서 가져다 사용하고 불은 식물유가 아니면 석유 호롱불을 사용했고 쌀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거의 다 일본으로 실어 갔으니 봄철에는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는 수가 허다했다.

 

이와 비슷한 상태가 어쩌면 우리 외무부의 초창기도(지금은 외교부)가 아니였을까 싶다.

 

외무부는 그야말로 거의 무에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부처는 그나마 일제 때 조선총독부에 거의 다 조금은 뿌리와 골격이 있었지만 외교분야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때부터 일제가 강탈해갔으니, 일제 외무성이나 만주국 외교관으로 근무한 2~3명의 외교관 경험있는 사람이 전부라고 한다.

 

그래도 1948년 정부수립 당시에는 어마어마하고 거대한 기구를 갖고 출범은 했으나 정착이 되기도 전에 6?25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임시수도시대를 맞게 되었으니 다시 시작해야하는 꼴이 되었다.

 

1954년 2월 필자가 외무부에 입부했을 때, 그 T.O.는 본부 44명, 재외공관 36명 총 80명이었다. 그 기구는 장?차관 밑에 정무국에 1과, 2과, 통상국에 정책과, 교역과, 정보국에 보도과, 문화과 그리고 비서실 밑에 총무과, 의전과, 문서과가 있는 아주 단촐한 것이었으며, 40명이 조금 넘는 직원은 모두가 다 한 집안 식구나 다름없었다.

 

그 후 몇 차례의 기구개편을 통해 외무부의 위상은 많이 달라졌으며, 60년대 중반에는 경제외교 일원화가 실현되면서 필자는 그 모델 케이스 비슷하게 1964년 서독 함부르크에 1인 공관을 창설하기 위해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서독에는 경제기획원 직원 2명, 상공부 상무관 1명, 조달청 구매관 1명이 본(Bonn) 대사관에 주재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본국으로 소환하고 그 대신 필자가 함부르크 영사관(2개월 후에 총영사관으로 승격함)을 창설하여 돌아간 주재관들의 업무를 거의 모두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6개월쯤 지나서 구매관 업무는 가격, 품질 등 전문성이 중요하다 하여 구매관이 다시 부임해 오고 총영사 한 사람의 업무가 너무나 과중하다 하여 부영사도 한 사람 충원하게 되었다.

 

전 독일을 다니면서 수출증진을 위한 업무를 모두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일례를 들면 소련의 게살 통조림 ‘첵카’는 셀루로이드 뼈가 잘 제거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영덕 게살 통조림은 똑같은 분량인데 셀루로이드 뼈가 있다 하여 소련제의 60% 가격이었고, 또 목욕용으로 쓰이는 수세미로 만든 때밀이(Bathmit)는 한 타에 미불로 환산하면 20센트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또 인삼주를 우리는 약이라고 주장하고 당국은 술이라 하여 관세율을 가지고 아웅다웅 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로서는 유일하게 공산품으로써 서독에 ‘아이디일 미싱 헤드(head)’를 수출했는데 대당 가격이 미불로 10불 전후였는데, 서독 수입업자는 미싱대와 모터를 가공하여 아프리카에 70불 이상으로 수출한 것으로 기억된다.

 

함부르크 시내에 있는 300개 가까운 수입전문 상사를 방문하여 단 100불 정도라도 좋으니 우리 상품을 시험수입해달라고 뛰어다녔으니, 지금 우리 외교부 직원이 이 글을 읽으면 웃겠지만 “수출만이 우리가 살길이다”라고 외치던 당시로서는 외교관 모두가 수출증진을 위해 뛰고 또 뛰어야했다.

 

하기사 국립서울대학교에 무역학과가 생긴 것이 60년대 말이고 필자도 무역관계 공부를 하기 위해 부임도중 동경에서 무역학 서적을 사가지고 가서 공부하면서 집무했다.

 

70년대 들어서는 각 공관마다 수출할당제가 실시되어 공관장 이하 전 직원이 수출증진을 위해 뛰었고 연말이 되면 수출액이나 수출 신장율 등을 평가하여 우수공관에는 상여금이 주어지기도 했다.

 

1964~68년간 함부르크에서의 공부와 경험한 덕택으로 퇴임 후 대학에서 무역학관계 강의를 하게 되었으니 공든 탑은 엉뚱한 곳에서 빛을 보게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1964년 10월 30일 1억 불 수출을 달성한 우리나라가 이 날을 ‘수출의 날‘로 기리다가 지금은 ’무역의 날‘로 기리고 있으며, 새해 2015년에는 아마도 수출이 6,000억 불을 돌파할 것이라 하니 필자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생각나는 일은 아직도 많이 있으나 기억을 더듬어 쓴 것이니 연대나 일자 등에 혹시 착오가 있더라도 널리 이해해 주기 바라면서 끝낼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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