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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구 / 내 인생의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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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06-20 13:18 조회8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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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징검다리                           

 

이경구 전 주 센다이 총영사

 

 

   청주 북쪽 자락에 있는 주성동(酒城洞) 새터는 내가 살던 고향이다. 초가 마을 동쪽에는 모래재라는 야산이 있는데, 어렸을 적에 친구들하고 산딸기를 따려고 자주 올랐다. 시내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여름 방학에는 아버지를 따라 어귀 너머 들로 나가 물꼬를 보았으며 둠벙에서 물을 퍼서 논에 대었다. 도청에 다니셨던 아버지는 농사일이 짧으시고 체력도 달리셨다. 

 

   점심을 먹고 나면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섰다. 새경이 올라 머슴을 두지 못해서 내가 꼴을 베 와야 하였다. 소가 좋아하는 바랭이를 지게에 한 짐을 지고 어둠이 내릴 무렵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가 마루에 저녁 밥상을 차려 주었고 아버지는 외양간의 소에게 바랭이를 갖다 주었다. 방학이 끝나는 날, 왼쪽 손가락의 낫에 베인 자국들을 세어 보니까 열 군데나 되는데, 눈썹 모양의 낮달을 닮았다. 지게가 영어로 A-frame 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우리 집 텃밭에 모란이 피던 봄, 나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 대학 2학년 때 리처드 러트(Richard Rutt)라는 성공회 신부로부터 셰익스피어의 『Hamlet』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이 희곡에는 다음과 같은 명언들이 들어 있다. Frailty, thy name is woman!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To thine own self be true. (너 자신에게 성실하라.) Brevity is the soul of wit. (간결은 기지의 정수니라.)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는 천재적인 언어 사용 재능을 가지고 있는 영국 시인이자 극작가임을 배웠다.

 

   러트 신부는 한국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내가 수집한 신부의 저서 중에 『JAMES SCARTH GALE and his HISTORY OF THE KOREAN PEOPLE』이 있다. 캐나다 선교사이자 개척자적 학자인 제임스 S. 게일이 1927년에 영어로 낸 책에 러트 신부가 해제(解題)를 붙이고 잘못된 어법은 바로잡아서 1972년에 다시 낸 것이다. 단군 신화부터 조선 멸망까지의 역사가 인물 중심으로 쓰여 있는데, 영어로 쓰인 한국사 서적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2011년에 영국에서 작고한 러트 신부는 영문으로 올바르게 쓰인 한국사를 한국인에게 전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내가 서울 노량진에서 살 때이다. 어느 추운 날 옥상 정원에 나와보니, 망초가 함박눈을 맞고 있었다. 아내가 상추를 기르는 화분에 난데없이 잡초가 돋아나 있다. 한데서 겨울을 나는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내버려 두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봄에 꽃을 피우는데, 그렇게 작고 못생긴 꽃은 처음 보았다. 또 꽃에 꿀벌이 앉는데, 보니 겨우 파리만 하다. 그런 꿀벌은 처음 본다.

 

   그 후로 옥상에 망초를 길렀다. 날이 가물 때는 물도 주고 잎사귀 뒤쪽에 붙어 있는 진딧물에 살충제도 뿌려 주었다. 식물도감에 보니 집필자가 망초는 악질적인 잡초라고 하는데, 다른 잡초보다 뿌리가 끈질기고 줄기도 꼿꼿해서 그렇게 혹평을 하는 것 같다. 하루는 노끈을 사다가 날로 하여 모아 둔 마른 망초 줄기로 발을 엮어 서재 창문에 달았더니, 운치가 있어 보인다. 창문 앞에 심은 나팔꽃 줄기도 망초 발을 감아 올라가서 꽃들을 피우자, 창문 햇빛 가리개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내가 일을 보던 부서는 외교안보연구원이다. 외교 현안에 대한 정책 연구와 외교관 양성을 위한 교육 훈련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국내 대학의 국제법 교과서와 다른 나라의 참고문헌과 첫 해외 근무지인 미얀마의 양곤에서 산 오펜하임 국제법(Oppenheims International Law, Eighth Edition, Longmans)을 참고하여, 십여 년간 힘들여 모은 외교 문서들을 독자가 활용하기 편리하게 국가의 승인에 관한 공한, 외교관의 부임에 관한 공한, 항의에 관한 공한, 등으로 나누어, 『外交文書作成法』 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오펜하임 국제법에는 De facto recognition of a State’라는 라틴 용어가 나오는데, 사실상의 승인’이라는 뜻이다.

 

   1978년에 출판된 336쪽에 달하는 이 책의 “序言”은 이렇게 시작된다. “著者는 우리나라의 外交가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해 감을 느낄 때마다 우리에게는 우리 실정에 맞는 外交文書의 작성법에 관한 案內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책을 본부와 재외 공관에 배포했더니 평이 좋았다. 내가 연구원을 떠난 후에도 재판이 거듭되었다. 최초로 재외 공관 근무를 발령받은 외교관들이 『外交文書作成法』을 꼭 찾는다니 흐뭇하였다.

 

   공직을 정년퇴직한 후에는 학교와 무역 회사와 공공 기관에 근무하는 분들을 위해 1995년에『영문편지 쓰는 법』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자녀들이 여러 직종의 영문 편지를 수집하였고, 아내가 집필을 도와 주었고, 영국의 보험 회사 직원 앤드루 C. 호어(Andrew C. Hoare) 씨가 교정을 보았으며, 2005년에 별세한 학술 출판계의 거목 일지사 (一志社)의 김성재(金聖哉) 사장이 원고를 출판하였다 

   저서가 서울 일간지에 소개되자, 직장 동료와 친구들이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로 가서 책을 사주어 고마웠다. 어느 대학교 관광과 교수는 출판사를 찾아가서 저서를 교재로 쓴다고 구매하였다. 인천 지방 공무원 교육원의 요청을 받고 영문 사교 편지 작성에 관한 강의도 하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밀러 크리크 마을 (Village at Miller Creek) 앞에는 도로가 남북으로 나 있다. 도로변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며, 전에는 많은 연어가 산란한 적이 있다고 해서 연어를 그린 도로 표지가 여러 군데 서 있다. 연어 그림은 시카고에 있는 꼬마 화가인 어린 손자를 생각나게 한다. 아침 산책길에 걸음을 멈추고 시냇물을 들여다보면, 얼굴에 생긴 잔주름이 물에 씻기는 것 같다.

 

   2016 8월 어느 날, 사위네 가족과 우리 부부는 클리퍼(CLIPPER)라는 쾌속 범선을 타고 후안 데 후카 해협을 건너 캐나다의 빅토리아로 향하였다. 내가 80년 넘게 살아온 발자취와 인생의 낙수에 대하여 쓴 두 번째 수필집 『시애틀의 낮달』의 출판 기념으로 사위가 시켜주는 관광 여행이다. 책 제목은 우리 마을 하늘에 낮에 뜨는 하현달에서 따왔는데, 내가 살던 고향을 떠올린다. 

 

   여행 목적지에 도착하자 먼저 주 의사당을 찾아갔는데, 서구식 석조 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위풍당당해 보인다. 화려하고 멋있게 꾸민 내부 벽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한 저명한 인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1999 4월 방한 중에 서울 인사동에 있는 명신당필방과 박영숙요()와 한복점 꼬세르를 둘러봤을 적에는 가까이서 뵌 적이 있다. 옆방으로 들어가니, 널따린 벽에  Korean War 1950-1953’이라는 네모꼴 액자가 걸려 있다. 27,000명의 캐나다 용사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516명이 전사했다는 액자 속의 글을 읽으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나는 Ricciardi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있는 안내자에게 “수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파병해 준 캐나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관광객들이 손뼉을 쳤으며, 안내자는 안내를 맡은 이래 처음 듣는 찬사란다. 그녀는 내가 여행기를 쓴다면 보내 달라고 하였다. 관광객들에게 상냥히 대하던 안내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늘이 맑은 어느 가을날, 이날도 우리 부부는 마을 앞길로 나와 아침 산책길에 나섰다. 집 뒤쪽 북행 1번가로 해서 다시 연어 그림 표지 쪽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수필집을 합작하여 내자고 말한다. 내가 새로 발표한 작품과 자기가 쓰고 있는 글을 합치면, 또 하나의 징검다리 디딤돌이 된다는 것이다. 아내가 늘그막에 글을 쓰는 줄을 미처 몰랐다(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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