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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제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아~우리나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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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영민 작성일13-04-01 21:22 조회3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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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제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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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8일부터 외교협회 회원들과 대마도를 다녀왔다.

전직대사들이 그룹으로 함께 다니는 것이 목격되고,

특히 한일 관계가 긴장되었다 하면, 옛날 같으면 신문에 한 줄 정도의 기사가 실릴만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대사 한두 명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소위 주요국 대사를 지낸 분이 무려 40여 명씩 움직였다.
 

북한이 세계열강들을 비웃듯 전 세계 나라들이 그렇게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던 핵 실험을 단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미국 및 남한정부와의 관계가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덕분(?)에 한~일간의 독도문제는 진정되었던 시점이었다.


그 회동에 막상 참여해 보니 무슨 의미가 있는 모임도 아니었다.

각자 혼자 가면, 돈이 많이 들 테니, 단체로 함께 가면 경비가 적게 들기에 계획된 모임이었다.

회원들 대부분은 70-80세. 나이는 들고, 은퇴한지도 오래라 돈이 있을 나이가 아니다.

 
낙선제라고 하면, 으레 덕혜옹주를 연상, 혹시나 그녀를 미화하고

일본 대마도주(총독)의 아들이었던 그녀의 남편 소 다케유끼(宗武志) 씨를 욕보이게 하려는 생각이

깔려있지 않나 하고 의심을 받을 만도 하였다. 그러나 대마도 이야기를 하면서

옹주 이야기를 포함 시키지 않을 수도 없어,

사실을 사실대로 옮겨 보자고 마음먹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덕혜 옹주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냄이 순서일성 싶다.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1852-1919)과 후궁이었던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 황제가 60이 되던 해에 얻은 고명딸로,

환갑이 넘어 늦게 딸을 얻은 고종의 사랑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단지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이 귀여운 대한제국 황실의 딸을

당시 세력을 얻어가던 일본 놈들이 채가고, 일본 놈하고 결혼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옹주가 더 더욱 애처로웠고 가련하게 보였다.


고종의 이런「한」같은 바램 때문에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고종이 조선사람 집안에 옹주를 몰래 시집 보내려던 계획이 사전에 탄로 나서,

앞으로는 대한제국 황실집안의 아이들이 결혼을 하려면 꼭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으라는

새로운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덕혜옹주가 서울의 하노태(日出, 소학교)를 다닐 때,

얼굴 예쁘고 살이 통통히 찐 옹주를 보러 문밖에 서성대는 고종의 모습이 문밖에서 보이는 것이

가끔 목격되기도 하였다.


옹주는 소학교를 마치고 일본에 강제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1925년 여자 학습원에 입학은 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신경쇠
약이 걸렸다.


당시 일본 황후「사다코」개입으로 옹주는 18세 때인 1931.5.8 나쁜 소문이 퍼졌으나
실질적으로는 동경대 영문학과 학생이던 대마도의 주인인 미남 소 다케유끼(당시 23세) 와 정략 결혼하게 된다. 일본측의 마음대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하게 되었다. 이어 이듬해 8월 장녀 정혜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1년 만에 정혜마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옹주는 신경쇠약과 치매기운이 악화되어 거의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극심한 우울증이 합병 증세를 보였다. 남편과도 이런 병세가 악화되어,1955년  결국 이혼한다.


해방 후 건국이 되자 이승만대통령은 옛 조선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를 차단하기 위해

옹주에 대한 귀국 신청을 일체 불허했다.

옹주의 귀국은 5.16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허가의 덕으로,

일본정부가 마련한 특별기편으로 고국으로 돌아온다.


옹주는 귀국 후 서울대 병원에 입원요양됐다가 추후 창덕궁 낙선제로
거소를 옮기더니,

1989년 4월 21일, 만 76세로 세상을 떠난다.


아무래도 인생 자체가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여도

옹주의 인생은 신경쇠약으로 아픈 속에 우울증으로 허덕이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딸 정혜까지 죽고 식민지에서 산다는 것이 자신의 의사와는 달랐기 때문에,

더욱 괴로워하였다. 비록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더더욱 말이 없어 졌다.


현재의 결혼기념비의 비석은. 옹주가 결혼한 1931년,

대마도에 살던 재일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옹주의 대마도 입성을 축하하는 뜻에서

이즈하라 하지만구(팔번궁) 경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나, 20여 년이 지난 뒤 1962년,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일시 철거되어 2001년 복원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방치되었던 비석은 넘어져서 그 위로 잡초 넝쿨이 무성하게 자라서,

비석의 본체는 거의 참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당시 대마도 거주 재일동포들의 사정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시행한 조선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우리 동포들은 모두 경작지를 빼앗겼다.


토지를 잃은 이들은 생계를 위해 숯 굽는 공장 등에
품팔이로 농촌을 떠나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이주한 동포들의 수는 전 도민의 1할에 달하는 3천명 선.

이들은 일제히 “대마도주가 우리나라 왕녀를 며느리로 맞아드렸다”고 덕혜 옹주의 대마도 입주를 기뻐했다.

동포들은 다 같이 가난한 처지였지만, 이런 뜻에서 성금을 모아,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옹주의 병세 악화로 2사람의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여 끝내 이혼에 이르자,

세웠던 기념비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교민들의 기억에서도 멀어지고,

고작 기부금을 냈던 96세의 백화수(白化洙) 할아버지만 알고 있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충북의 청주신문사가 2000년에 관한 덕혜옹주 위령제에 참여한 여행객 2백여 명(인솔해설자: 정영호 교수)이

2000년 3월 방치된 기념비를 찾아냈다.


역사탐방을 이해 수차례 대마도를 방문한바 있는 정 교수는
이때부터

덕혜 옹주의 결혼 기념비 재건운동에 앞장서 왔다(시마무라 하츠요시 편지, 쓰시마 신코(對馬新考) 2004. 참조).

비운의 조선조 덕혜 옹주는 이렇게 하여, 조그만 일본의 섬에서 청춘을 보내고,

황혼이 지는 나이에, 대한민국과 한~일간의 정치 희생양이 되어 귀국하게 되었다.


그런데 창덕궁 낙선 제에서 돌아가신 뒤, 덕혜 옹주의 비운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덕혜 옹주가 쓰시던 조그만 일기장이 그 방에서 발견되었는데,

덕혜 옹주께서 제정신이 돌아오던 10분 내지 15분 정도의 시간에 쓰신 글씨 때문이었다.


그 분은 본래가 정신이 나가면 글씨를 못 썼고,

설령 쓴다해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린 글씨일 정도로 엉터리였다.


“나는 이 낙선 제에서 오래 오래 살고 싶어요. 아~우리나라 대한민국”


옆에서 임종을 지켜보던 이방자 여사가 한 마디를 하였다.

한국에 시집오지 않았다면, 일본 천황 비는 맡아놓은 당상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진 재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고인에 대해 나도모르게 인사말이 나왔다.


“공주님, 그 동안 고생 많이 하셨어요.

앞으로 이 나라는 뻗어나가리라고 봅니다!”


<권영민/주(駐) 독일, 노르웨이, 덴마크 대사, 어틀란타 총영사 역임/

용산고~서울대 문리대 독문학과 졸/아산 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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