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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태익 / 사라진 헤이그 밀사 후손 러시아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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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4-08-18 17:13 조회3,9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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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익 전 청와대외교수석의 외교비사


사라진 헤이그 밀사 후손 러시아서 찾았다 상 러시아 황제가 헤이그 밀사 이위종에 장례비를 준 까닭은?

  

[프리미엄조선] 일시 : 2014.08.18 15:31

근현대사 아로새긴 이범진-이위종 부자 애사(哀史) 발굴기

 필자가 제7대 러시아 대사로 부임한 것은 2002년 3월이었다. 전임 이재춘 대사가 기획해놓은 한ㆍ러 친선 특급 열차 행사의 준비가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현안으로 남아 있었다. 특급 열차 행사는 정치, 경제, 문화, 언론, 학생, 주부 등 각계 인사 300여 명으로 구성된 한국의 친선 사절단이 2002년 7월 14일부터 8월 1일까지 시베리아횡단열차(TSR)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약 1만km를 달리며 다채로운 행사를 펼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이르쿠추크, 예카데린브루크, 노보시비르스크,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각각 며칠씩 머무르는 동안 지역별로 명사간담회, 기업상담회, 사물놀이, 한국영화제 및 사진전, 청년포럼 및 축제 등 다양한 교류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런 한ㆍ러 국민 간 친선행사는 양국 교류협력의 틀을 넓히고 우호의 꽃을 활짝 피우는 계기를 만드는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한ㆍ러 친선 특급 열차 행사는 수많은 러시아 국민을 대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한ㆍ러 외교사에도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외교행사였다. 정부 대 정부의 형식을 넘어서 국민 대 국민(People to people)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외교를 통해 한국의 국가적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고 러시아 국민에게 진취적인 한국인의 기상을 각인시킬 수 있는 대규모 외교행사라는 점에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모범적 사례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한ㆍ러 친선 특급 열차 행사는 남한과 북한,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역사적 과업을 실현하기 위해서 야심차게 추진되고 있던 시베리아횡단철도(TSR)-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사업과 궤도를 같이하는 사업이었다. 더욱 의미를 확대시켜 보면 동서냉전과 남북분단으로 잃어버렸던 90년 가까운 역사의 공백을 메우고, 잊혀진 민족의 대륙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교두보를 구축하는 성격의 상징적 행사이기도 했다.


 2002년 7월, 한·러 친선특급열차 행사 때 정태익 대사가 초대 주러 공사관 현판 부착식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다.

▲ 2002년 7월, 한·러 친선특급열차 행사 때 정태익 대사가 초대 주러 공사관 현판 부착식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다.

한·러 친선 특급 열차 행사 대미 장식한 이범진 추모비 제막식

이러한 뜻깊은 의미를 지니며 한ㆍ러 외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추진된 국민과 국민 간의 풀뿌리 외교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였다. 다행히 필자에게는 대통령 의전행사의 베테랑인 백영선 공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었다. 우선 300여 명이 탈 수 있는 철도 열차 7량을 러시아 정부로부터 전용 임차하는 계약을 맺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시베리아횡단철도가 경유하는 러시아 주요 7개 도시에서 각각 며칠간 체류할 호텔을 계약하고 한국의 밤, 주 정부 인사 방문, 문화공연, 기업상담회, 학술대회 등 각종 행사를 조직하기 위해서도 무수한 예약이 요구되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오죽하면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행사를 제일 많이 치렀던 백영선 공사가 일생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의전행사를 치렀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더욱이 러시아의 업무 처리 여건과 행사 사정은 매우 열악하였다.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70명 가까운 대사관 직원들이 준비 작업에 모두 동원되었다. 당연히 대사관은 텅 빌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한 언론에서 “주러 대사관은 개점휴업 상태”라고 보도하는 바람에 이를 해명하느라고 진땀을 빼야만 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한ㆍ러 친선 특급 열차 행사는 갓 부임한 필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었다. 러시아 각지를 직접 방문하여 현지 사정을 익히고 지방정부 관계자들과 면식을 넓히는 등 외교활동 기반을 닦을 기회를 제공해 준 행사였기 때문이다. 행사는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고, 준비가 철저했기 때문에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사고도 없이 완벽하게 마칠 수 있었다. 한ㆍ러 친선 사절단은 전임자인 이재춘 대사가 단장을 맡아 이끌었고 필자는 주러 신임대사로 사절단을 맞이하여 모든 행사를 함께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행사가 있기 1년 전인 2001년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전용열차를 타고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 김 위원장은 대낮에 열차를 운행하여 방문 기간 내내 러시아 일반 시민에게 엄청난 불편을 야기시키는 바람에 원성을 샀다. 많은 러시아 시민이 소송을 제기하여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는 등 대소동이 이어졌다. 이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열차를 야간에만 운행하여 러시아 일반 시민의 불평을 한마디도 듣지 않고 행사를 마쳐 대조를 이루었다.

행사의 가장 기념비적인 부분은 한ㆍ러 친선 특급 열차 행사의 대미를 주러 초대 상주공사인 이범진 선생의 추모비를 제막하는 행사와, 주러 상주공사관이 소재했던 건물을 찾아내 기념현판을 부착하는 행사로 장식했다는 사실이다. 추모비 제막식은 500여 명의 한국과 러시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격식을 갖춘 의장대가 동원되는 등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었다. 아마도 우리 외교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기념식일 뿐만 아니라 한ㆍ러 외교의 새 역사를 쓰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고 확신한다.

특히 이 날의 추모비 제막식은 쓰러져가는 대한제국과 운명을 함께했던 비운의 풍운아 이범진 공사와 그의 아들 이위종 선생의 생애에 대한 위로와 동시에 애국선열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이범진 공사는 초대 주러시아 상주공사로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재임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다. 그러다가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이 상실되자 1911년 자진함으로써 비극적 생애를 마감하였다. 고 이범진 공사는 죽음으로 애국정신을 발휘한 비운의 애국 외교사절의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장남 기종 고국에 남기고 차남 위종과 국제외교 무대서 활약

이범진 공사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대한제국의 운명에 대해 보다 상세히 살펴보자.
이범진의 본관은 전주(全州) 이씨, 자는 성삼(聖三)이다. 그의 부친 이경하(李景夏)는 조선 왕조 무관으로 병인양요 때 로스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이범진은 1879년(고종 16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명성황후의 후원으로 궁중에 출입하였고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친일파를 몰아내는 데 힘썼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위기를 느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이범진, 이완용을 입각시켜 친러 내각을 구성했다. 1895년(고종 32년) 이에 반발한 일제가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명성황후시해사건(乙未事變)을 일으키자 러시아공사관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일제와 친일파가 주도하는 제4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여 고종황제를 미국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春生問)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이범진 공사

   ▲ 이범진 공사   

이후 이범진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단발령 등 과격한 개혁으로 민심이 소란한 틈을 타서 다시 국내에 잠입한 이범진은 러시아를 설득하여 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하도록 하였다. 1896년 2월 7일 인천 제물포항에 러시아 군함이 입항했으며 1백여 명의 군사가 러시아공관 수비를 명분으로 서울에 입성하였다. 이범진은 고종황제와 황태자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그해 7월 군인을 경복궁에 투입, 총리대신 김홍집,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등을 죽이고 친일파를 역적으로 몰아 처단하고 박정양을 수반으로 친러파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범진은 명성황후시해사건 재수사를 주장하여 일본을 압박하였다. 하지만 갑자기 주미 공사로 임명되어 1896년 7월 제물포에서 프랑스 군함을 타고 미국 워싱턴으로 떠나 3년간 머물렀다. 1899년 3월 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어 1900년 부임지인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였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대한제국의 공식행사를 주관하였고 1901년 다시 러시아공사에 임명되어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고종과 차르의 밀서를 전달하며 러시아의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러시아는 일본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보호에 소극적으로 대하고 만주지역의 이권사업에만 관심을 두었다. 고종황제는 풍전등화와 같은 대한 제국을 구하고자 마지막까지 처절한 외교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04년 2월,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패권을 다투던 러시아와 일본 간에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발발하였고, 전쟁 기간에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러시아에 유리하도록 숨은 외교활동을 하였다. 러시아가 패전하여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이 몰락하자 이범진은 러시아에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었고 이듬해 주러시아 공사관은 폐쇄되었다. 1907년 고종은 이범진을 통해 국제 사회에 조선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범진은 이들을 지원하여 러시아의 도움을 받게 하였고 아들 이위종이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을 도와 헤이그에서 활약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범진은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최재형 등과 협력해 동의회(同義會)를 결성했다. 의병부대를 조직해 조선으로 진격할 계획을 실천하였으며 한글신문인 해조신문(海潮新聞) 발간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정신적 충격을 받고 이듬해 1월 26일 자결하였다.

친선 특급 열차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초대 주러 상주공사관이 위치하였던 건물에 기념현판을 부착하는 허가가 난관에 봉착하여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시의 야코블레프 시장을 직접 만났다. 당시 이범진 공사의 비극적인 생애에 대해 설명하고 요청하였더니 시장은 크게 감동을 받고 허가 조처를 취해 주었다.

1905년 러시아 놀껜 남작 딸과 결혼한 헤이그 밀사 이위종

이범진 공사의 아들이자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일원인 외로운 독립운동가 이위종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는 것도 대한제국의 최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07년 당시 고종황제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과 대한제국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명의 특사는 현지에서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게다가 일본은 오히려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을 협박,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로써 필사적으로 대한제국을 살리고자 했던 고종황제의 외교적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나라의 국사 교과서는 이위종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고 있고, 이에 따라 일반인들도 그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낯선 러시아 땅에서 이위종만큼 나라 잃은 설움을 처절하게 느꼈던 한국인도 없었을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중국 땅이나 연해주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들만 해도 서로 힘을 규합하고 위로해줄 동지가 있었지만, 외톨이 독립운동가 이위종은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홀로 항일 의지를 다져야만 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당시의 국제사회에서 자강하지 못하면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된다는 전형을 이위종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에도 그에 관한 최소한의 기록조차 발굴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그의 삶이 시간의 망각 속에 묻혀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오랜 기간의 냉전 체제를 거쳐 지난 1990년에야 비로소 소련과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진 일천한 한ㆍ러 관계사이고 보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위종이라는 인물은 러시아 고문서상 최초의 주러 공사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부임한 부친 이범진 공사와 함께 등장한다. 사료를 근거로 유추해 보건대, 이범진 공사는 장남 이기종은 한국에 남겨둔 상태에서 차남 이위종만 데리고 주미 공사로 4년을 생활했던 것 같다. 이후 러시아 주재공사로 부임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할 때 이위종을 파리 소재 초등군사학교에 입교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료적 근거가 있다. 1905년 이위종은 빼쩨르부르그 블라디미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1904년 파리 소재 시리아 초등군사학교 졸업을 2개월 남겨두고 퇴교했던 사실이 입학 절차상 결격사유로 작용하여 끝내 학교 입학을 거부당했다. 그러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친에게로 와서 공사관 1등 서기관으로 일했다. 1905년 11월 12일 이위종은 놀껜 남작의 딸인 바로네사 엘리자베따 놀껜과 결혼했다.

1919년 모스크바에서 항일투쟁 촉구 연설 이후 행방 묘연

그러나 이위종은 무너진 조국의 국운과 함께 신혼의 단꿈마저 온데간데없이 파란만장한 인생 역경을 겪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부친의 자살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사료로는 부친의 사망 직후 그가 니콜라이 2세에 보낸 진정서가 있다. 그는 이 진정서에서 부친의 사망으로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한꺼번에 상실했다고 애통해했다. 선친의 유산은커녕 당장 치러야 할 장례비마저 없었던 것이다. 이위종은 부친의 사망 이틀 뒤인 1월 15일 차르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장례비 500루블만이라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외무부를 통해 이 돈을 즉각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그만큼 이위종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위종은 러시아 국적 취득에 이어 세습귀족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얻게 되었다. 그 이후로 공식 문서에는 반드시 ‘세습귀족 이위종’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한편 이위종이 블라디미르 사관학교 입교에 강한 집념을 보였던 것은 항일 투쟁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19년 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국해방 지지결의 대회에서 “러시아와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들 주축으로 한국인 부대를 결성하여 최우선적으로 시베리아와 한국에서 일본인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러시아 정부에 호소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이위종은 러시아 혁명 이후 외국 간섭군과의 전투에 참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전선에서 최후를 마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부친 이범진 공사와 마찬가지로 그의 행적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가 숨진 그 자리에 묘비라도 건립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친 묘지에 함께 안장시켜야 하는 후손으로서의 과제가 남아있다.
지금까지 러시아 땅에서 활약한 이범진, 이위종 부자의 쓰러져가는 조국을 마지막까지 지키려는 외교관으로서의 인생 역정과 항일투쟁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이범진 공사는 시신이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추모비를 통해 고혼을 달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위종 선생의 경우에는 아예 작은 추모비조차 건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다행히 한ㆍ러 친선 특급 열차 행사를 하면서 우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범진 공사와 그 아들 이위종의 혈육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주러 한국 대사관이 한ㆍ러 친선 특급 열차 행사를 준비하면서 역점을 둔 사업은 이범진 공사 부자의 발자취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는 고려인으로서 한ㆍ러 역사에 조예가 깊은 박 보리스 교수 부녀와 역사 발굴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두 사람은 러시아 문서고를 모두 뒤져 공사관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을 비롯하여 이범진 공사의 묘소를 찾는 일과 러시아 남작의 딸과 결혼한 이위종 서기관의 후손을 찾아내는 일을 성사시켰다.

출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14/20140814040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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