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 언론기고 및 출판





<조선일보> 정태익 / 청와대 출근 첫날 자정 걸려온 핫라인 미국은 1시간 후 아프가스탄을 공격합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일2014-03-03 17:09 조회3,313회 댓글0건

본문

 


정태익 전 청와대외교수석의 외교비사


"청와대 출근 첫날 자정 걸려온 핫라인 "미국은 1시간 후 아프가스탄을 공격합니다" 나는 잠든 대통령을 깨워야 했다.

[조선일보] 일시 : 2014.01.22 15:03


필자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기 전 2001년 7월 외교안보연구원장 발령을 받았다.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임명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필자가 1998년 초부터 2000년 말까지 주이태리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김 대통령께서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이태리를 방문했다. 2000년이었다. 당시 김 대통령은 참피 이태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교황 요한 바오로2세도 알현했다.

교황의 축복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라는 인식을 한 김 대통령이 전대 미문의 이태리 방문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룬 데에는 주이태리 대사관의 역할이 컸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 대통령은 이태리 정부의 수상과 교황에게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유도하는 일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하였다.

김 대통령의 이태리 방문 이후 실제로 람베르토 디니 이태리 외상이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개혁개방을 적극 설득하는 후속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우리 대통령 사상 초유의 이태리 방문은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는 역사적 사건의 토대가 된 셈이었다.

외교안보원장 3개월만에 임동원·김하중 추천으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낙점

외교안보연구원장이 된 필자는 취임 일성으로 외교사료관 설치의 포부를 밝혔다. 이웃 일본은 이미 우리보다 약 30년 전부터 외교사료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 치하에 있었던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적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일본의 외교사료관에 보관된 자료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 최서면 동경문화원장이 일본의 외교사료관을 상시로 출입하면서 한일관계 사료를 연구하거나 우리가 상실한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물론 독도에 관한 자료가 주된 관심사였다. 최 원장은 필자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주일 한국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할 때 같은 아파트의 아래위층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업무적으로도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2001년 10월 7일 대국민연설을 통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내 테러 캠프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2001년 10월 7일 대국민연설을 통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내 테러 캠프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2001년 10월 7일 대국민연설을 통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내 테러 캠프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최 원장이 나에게 “외교사료관을 지으면 일본 외교사료관에 있는 식민지 기간 중의 역사적 자료를 모두 복사해 가져다주겠다”면서 재임 중 외교사료관을 반드시 지을 것을 몇 차례나 역설하였다.

외교안보연구원은 외교관 교육 및 훈련과 외교정책 연구를 동시에 담당하고 있는 외교부 산하기관이었고 원장은 정무직이었다. 당시만해도 외교문서는 대부분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외교사료관 신축 계획에 따라 외교문서 비밀해제를 위한 법령정비작업도 병행 추진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외교문제에 대한 연구를 주로 외국자료에 의존해 오던 학계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이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필자에게 다른 운명이 다가왔다. 원장으로 임명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전격적으로 대통령 외교안보수석으로 임명된 것이다.

임동원 통일장관 친북정책으로 국익 손상 이유 국회 불신임당하면서 연쇄 인사

2001년 8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이 과도한 친북정책으로 국익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국회에서 불신임을 당하는 정치파동이 있었다. 후임 통일부 장관으로 홍순영 주중대사가 임명되었고, 후임 주중대사로 김하중 외교안보수석이 내정되었다. 당시 필자는 2001년 9월초 비엔나에서 열리고 있던 세계외교안보연구원장회의에 참석중이었다.

정례적으로 각국에서 돌아가며 열리는 외교연구원장회의는 외교연구원 행정에 관한 정보 교류와 친목의 무대였다. 필자는 공공외교 진흥과 외교관의 홍보요원화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한승수 외무부 장관에게 제출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조지W 부시(왼쪽에서 두번째)미 대통령이 2001년 9월15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 장관, 폴 울포위츠 국방 부장관(왼쪽부터) 등과 긴급회의를 열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 공격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 조지W 부시(왼쪽에서 두번째)미 대통령이 2001년 9월15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 장관, 폴 울포위츠 국방 부장관(왼쪽부터) 등과 긴급회의를 열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 공격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조지W 부시(왼쪽에서 두번째)미 대통령이 2001년 9월15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 장관, 폴 울포위츠 국방 부장관(왼쪽부터) 등과 긴급회의를 열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 공격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경유지인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것이 하필이면 9월 11일이었다. 전 세계 언론은 흥분된 목소리로 9.11 테러사건을 집중 보도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영접 나온 이춘선 주프랑크푸르트 총영사가 필자에게 대통령 외교안보수석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미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자국 영토 내에서 당한 테러의 충격과 겹쳐지면서 외교관 인생에서 최고의 중책을 맡게 됐다는 사실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필경 나를 잘 아는 임동원 특보와 김하중 수석이 추천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외교관 후배인 김하중 수석은 외교부 아태국장에서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다음 단기간 내에 수석비서관이 됐을 정도로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다. 외교안보수석으로 내정을 받았지만 9·11사태로 정국이 긴장된 분위기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필자는 곧바로 임명장을 받을 수가 없었다.

청와대 출근 첫 날 자정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미국은 1시간후에 아프가스탄을 공격합니다”
나는 잠든 대통령을 깨워야했다

9·11사태 이후의 폭풍우 같은 혼란의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나 분위기가 다소 진정된 후인 2001년 10월 7일 필자는 외교안보수석으로 청와대에 첫 출근을 하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외교안보문제 최측근이자 복심(腹心)으로까지 통하던 임동원 특보는 필자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임 특보는 국회에서 통일부 장관 해임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김 대통령이 특보로 임명함으로써 두터운 신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필자는 임 특보와 잘 아는 사이였다. 임 특보가 주나이지리아 대사로 재직할 때인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 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 주라이베리아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는 나이지리아의 연방인 베누에주 담당 행사요원으로 주나이지리아 대사관에 파견되었다. 약 2개월 동안 주나이지리아 대사관으로 차출되어 정상방문을 뒷바라지하면서 임 특보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다가 여러 해가 지나 특보와 수석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임명된 뒤 첫날은 세계정세가 불안한 시기에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됐기에 매우 바쁘고 긴장된 하루였다. 외교안보수석은 외무부, 국방부, 통일원, 국가비상위원회를 관장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김동조 외교특보의 비서관으로 2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외교비서관으로 2년 동안 청와대 근무를 한 바 있었다.

그래서 청와대 근무가 어느 정도 익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수석이 되고나니 대통령과 직접 대면 기회가 수시로 주어져 긴장되고 조심스러웠다. 업무 인수인계 등으로 긴장 속에 어느 때보다 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잠이 어슴푸레 들었을 무렵이었다.

“따르릉~!” 외교안보수석이 된 뒤 집에 설치한 청와대 핫라인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자정이 막 넘은 시각이었다. 수화기를 들었더니 뜻밖에도 허바드 주한 미대사였다. “앞으로 두 시간 후에 미국은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 본부가 소재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합니다. 이 사실을 사전 통보하니 한국의 최고당국자(the highest destination)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허바드 대사는 “미국의 조치에 대해 한국 정부의 이해와 지지를 바란다”는 내용의 발언도 덧붙였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 미국 정부의 연락을 받은 당사자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에 곤히 주무시고 계실 대통령을 깨운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상주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상의하였다. “외교안보수석이 직접 대통령께 알리고 새벽 4시에 비상수석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도록 합시다.” 일단 비서실장과 상의한 다음 부속실을 통해 대통령을 깨웠다.
“외교안보수석입니다.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사태가 위중하여….”

필자는 대통령에게 미국 정부가 통보한 내용을 설명하였다. 아울러 비서실장 주재로 비상 수석회의를 소집하여 필요한 대책을 강구한 다음 결과를 보고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김 대통령은 필자의 이야기를 차분히 경청한 다음 조용하게 말했다.
“정 수석, 출근 첫날인데 새벽까지 수고가 많았습니다. 내일 아침 9시까지는 정부의 정리된 성명서가 나오도록 준비해 주세요.”

미국 정부의 전화를 받고 대통령에게 보고하기까지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한 시간 후면 아프가니스탄은 미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날 난 밤새 한잠 자지 못했다. 참고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테러의 배후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가 조직한 테러조직 알카에다(Al-Queda)를 보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상대로 미국과 동맹국들이 벌인 전쟁을 말한다.

2001년 10월 8일 미군과 영국군은 아프간의 수도 카불과 남부 칸다하르, 동북부의 잘랄라바드 등 주요 도시의 군사시설에 대한 공습을 감행, 아프간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이날 공격에는 50기의 토마호크순항미사일, B-1, B-2 등 15대의 폭격기와 25대의 전투기, 정찰기, 조기경보기, 항공모함, 군함, 잠수함 등이 동원되었다.

아프가니스탄 공격이나 전쟁 관련 동맹국에 중대조치 사전고지는 미국의 외교관행

이상주 비서실장이 긴급 소집한 새벽 비상대책회의가 시작되었다. 임동원 특보, 한덕수 정책기획수석, 김학재 민정수석, 필자인 정태익 외교안보수석, 조영달 교무수석, 유선호 정무수석, 이기호 경제수석, 오홍근 홍보수석, 이태복 복지수석, 전병헌 상황실장 등 수석회의 참석요원 전원이 자리를 함께 했다.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10월 8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하면서 아프간 사태에 따른 대책 마련을 지시하고 있다.
▲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10월 8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하면서 아프간 사태에 따른 대책 마련을 지시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10월 8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하면서 아프간 사태에 따른 대책 마련을 지시하고 있다.이날 비상대책회의의 주된 목적은 정부 성명서 문안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반인륜적 테러행위를 규탄하고, 테러행위에 대한 응징조치는 정당하며, 미국의 반테러조치를 지지하고 지원한다는 요지를 담은 외교안보수석실 성명서 초안을 기초로 청와대의 최종 성명서가 작성되었다. 한국 정부의 신속하고 시의적절한 조치는 미국 정부를 만족시키고도 남았다. 이렇게 하여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은 시작되었다.

동맹국에 중대조치를 사전에 알리는 것은 미국의 외교 관행이었다. 필자가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으로 재직하였을 때도 미 국무부는 주요국과의 정상회담이 있을 때마다 미국의 동맹국인 NATO(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과 한국, 일본, 호주에 대하여 사전과 사후에 정상회담의 요지와 결과를 항시 알려주었다. 동맹국들도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국내외 중대조치에 대해 미국에게 사전에 알리는 외교 관행을 실행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대중 대통령비서실은 매일 아침 8시에 수석회의를 열었고, 수석들은 회의안건을 사전에 점검하기 위해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하였다. 대통령 명의 성명서는 수석들 모두의 중지를 모아 작성되고 발표되었다. 대통령 외교안보수석으로 첫 출근한 2001년 10월 7일은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아온 필자에게 오래 기억될 가장 길고도 긴장된 하루였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이어져 후세인 대통령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이다. 미국이 일으킨 제2차 이라크 전쟁은 중동에서의 세력균형을 깨뜨리는 전략적 실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집트, 시리아, 이란, 이라크 등 지역 강국간의 균형이 중동의 안정을 유지시켜 왔는데, 이라크 침공으로 라이벌인 이란을 도리어 패권국으로 등장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미국이 더 큰 외교적 문제점을 안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중동에서의 무력행사는 미국을 경제력 뿐만 아니라 세계적 패권국가로서의 위상마저 약화시켰고 중국의 부상을 촉발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급기야 강해진 중국은 중동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이제는 필수 관여 국가가 되었다.

 

출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1/22/2014012202312.html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447건 7 페이지
회원 언론기고 및 출판 목록
번호 제목
267 <외교열전> 한중수교 기틀 닦은 중국 어뢰정 사…
일자: 03-09 | 조회: 3098
2012-03-09
3098
266 <외교열전> 9시간 만에 막 내린 모스크바 인질…
일자: 03-09 | 조회: 2950
2012-03-09
2950
265 <외교열전> '태산명동서일필'로 끝난 코리아게이…
일자: 03-09 | 조회: 3178
2012-03-09
3178
264 <외교열전> '초근목피' 들고 유엔 간 외무장관…
일자: 03-09 | 조회: 2214
2012-03-09
2214
263 <외교열전> 北 이집트대사 망명사건 '막전막후'…
일자: 03-09 | 조회: 3308
2012-03-09
3308
262 <외교열전> 우루과이 쌀협상서 '日 몽니' 눌렀…
일자: 03-09 | 조회: 3619
2012-03-09
3619
261 <외교열전> '법전' 든 대사관..유족 恨 풀어…
일자: 02-24 | 조회: 3261
2012-02-24
3261
260 <외교열전> 사선 넘나든 남북大使 '동반 탈출'…
일자: 02-24 | 조회: 5978
2012-02-24
5978
259 <외교열전> 김만철 일가를 데려와라
일자: 02-24 | 조회: 3267
2012-02-24
3267
258 <외교열전> 경수로 노형결정 '피말리는' 막전막…
일자: 02-24 | 조회: 2760
2012-02-24
2760
257 <외교열전> '3중국' APEC 가입 한국외교가…
일자: 02-24 | 조회: 3434
2012-02-24
3434
256 <외교열전> 월남탈출 교민,생계위해 이란行 택…
일자: 02-24 | 조회: 2902
2012-02-24
2902
255 <외교열전> 페루 日대사관저 인질극 '공포의72…
일자: 02-24 | 조회: 1929
2012-02-24
1929
254 <외교열전> '마유미' 극비호송..그 숨막혔던 …
일자: 02-24 | 조회: 4024
2012-02-24
4024
253 [시론-이춘선] 여수엑스포 성공하려면
일자: 02-23 | 조회: 1680
2012-02-23
1680
252 [시론-이춘선] 2조달러 발상은 中南美시장에서
일자: 02-23 | 조회: 1301
2012-02-23
1301
251 이념투쟁으로 변질된 한·미 FTA / 김용규
일자: 11-14 | 조회: 1586
2011-11-14
1586
250 <외교열전> '南核' 안보리 문턱까지 갔었다 /…
일자: 09-28 | 조회: 1686
2011-09-28
1686
249 <외교열전> 北대사 막판까지 유엔 동시가입 몰랐…
일자: 09-28 | 조회: 1968
2011-09-28
1968
248 <외교열전> 美中 정찰기 충돌갈등, 한국이 풀…
일자: 09-28 | 조회: 2112
2011-09-28
2112
247 <외교열전> 불시착機에 中 미사일 전문가 탔었…
일자: 09-28 | 조회: 3360
2011-09-28
3360
246 <외교열전> 한중수교때 김일성 '자주노선' 선…
일자: 09-28 | 조회: 4155
2011-09-28
4155
245 사회적 시장경제를 위하여 / 박찬진
일자: 09-09 | 조회: 1498
2011-09-09
1498
244 8·15에 생각하는 민주국가의 위기 / 이홍구
일자: 08-16 | 조회: 1371
2011-08-16
1371
243 2012 북한의 변화에 거는 기대 / 이홍구
일자: 08-16 | 조회: 1363
2011-08-16
1363
242 분열의 계절 … 통합의 선구자들 / 이홍구
일자: 08-16 | 조회: 1396
2011-08-16
1396
241 [Park Sang-seek] War between A…
일자: 08-09 | 조회: 1809
2011-08-09
1809
240 한반도로 몰려드는 세계 정치경제의 먹구름 / 윤영관
일자: 08-09 | 조회: 1470
2011-08-09
1470
239 [ESSAY ] 이은주의 사진으로 만난 인연 / 이인호
일자: 08-09 | 조회: 3637
2011-08-09
3637
238 중국 급부상에 맞춘 전략 찾자 / 박종선
일자: 08-09 | 조회: 2090
2011-08-09
2090
게시물 검색







한국외교협회 | 개인정보 보호관리자: 박경훈
E-mail: kcfr@hanmail.net

주소: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94길 33
TEL: 02-2186-3600 | FAX: 02-585-6204

Copyright(c) 한국외교협회 All Rights Reserved.
hosting by 1004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