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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김만철 일가를 데려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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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2-02-24 10:19 조회3,2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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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김만철 일가를 데려와라" 삼각 외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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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씨 가족 기념촬영
김만철씨 가족이 망명해서 김포공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본사자료)2005.3.12(서울= 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日도착뒤 대만 통한 \'우회 한국행\'..한ㆍ일ㆍ대만 줄다리기
北 의식한 日, \'공해상 표류\' 형식 검토했다 백지화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정묘정 기자 = 1987년 1월20일 저녁 칠흑 같은 어둠이 뒤덮은 일본 후쿠이(福井)현 미쿠니(三國)항의 방파제 앞바다. 국적 불명의 50t급 철선 한 척이 살을 에는 겨울바람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닻을 내렸다.

약 1시간 뒤 항내를 순찰하던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발견된 이 선박의 명칭은 \'청진호\'. 배에는 68세 노인부터 11세 어린이까지 모두 11명이 타고 있었다. 바로 6·25 전쟁 이후 사상 최초의 집단 탈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만철 씨 일가족이었다.

김씨 일가의 탈북은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한 목숨 건 대(大)모험극이었다. 함경북도 청진 의과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김씨 일가는 닷새 전인 1월15일 새벽 1시께 북한군의 삼엄한 경비망을 피해 청진항을 떠났다.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온 \'기획탈출\'이었다.

무작정 동쪽 공해상으로 향하던 청진호는 엔진 고장으로 표류한 끝에 일본 해안에 와 닿았다.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발견된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일본 정부로서는 외교적으로 골치 아픈 \'불청객\'을 떠안은 셈이었다. 이들의 망명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한국과 북한, 일본 사이에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 뻔했다.

문제의 핵심은 망명처였다. 해상보안청이 청진호를 인근 쓰루가(敦賀) 항으로 예인한 뒤 벌인 1차 조사에서는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다\'는 애매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사실 \'정답\'은 있을 수 없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가 어디인지에 대해 가족들마다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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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연합뉴스) 북한을 탈출한 김만철 씨 가족이 직접 몰고온 선박에 태극기를 달고 일본 쓰르가항에 입항하고 있다. 1987.2.1 (본사자료) 저작권자 ⓒ 2009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일본으로서는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당시 일본 어선 후지산마루호 선장이 불법어로 혐의로 북한에 억류 중이어서 북ㆍ일 관계는 미묘한 국면에 놓여 있었다. 일본이 이들 탈북자의 한국 망명에 적극 나선다면 북한을 \'자극\'해 불행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한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당시 한일관계는 최고의 밀월을 구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양국 정부는 1983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의 방한과 1984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 답방을 거치면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일본 외무성 측에서 김씨 일가족이 발견된 다음날 주일 한국대사관에 이들의 한국 망명의사 확인을 위한 면담을 해보라고 연락을 해온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다.

그때 주일 한국대사관에는 \'특명\'이 떨어졌다. 김씨 일가를 즉각 국내로 오게 하라는 긴급 훈령이 떨어진 것이다. 당시 외무부는 이규호 대사에서 보낸 훈령에서 한국망명 의사가 확인될 경우 결코 북한으로 송환돼서는 안되며 꼭 한국으로 보내져야 한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일본측에 전달토록 지시했다.
당시 정부가 김씨 일가의 한국행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체제안보와 국내정치적 측면에서 \'김만철 탈출극\'의 활용가치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우선 남북이 대결하는 상황에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소재\'로서 안성맞춤이었다. 또 국내정치적인 분위기를 일거에 바꿀 수 있는 모멘텀이기도 했다.
김씨 일가가 일본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1월19일 발생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만철 일가 탈출은 \'고문치사 정국\'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기회였다.

대사관 측은 1월22일 일본 정부에 김씨 일가의 한국 망명을 공식 요청했고, 이규호 주일 대사와 이기주 공사 등 대사관의 정무ㆍ정보 라인이 총동원돼 일본과의 교섭업무에 착수했다. 교섭의 중심은 외교부 내 대표적 일본통(通)으로 꼽히는 이재춘 정무참사관이 맡았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은 이규호 주일대사를 통해 김씨 일가의 한국 망명에 협조를 요청하는 친서를 나카소네 일본 총리에게 전달했다. 김씨 일가의 망명 사건이 한일 양국의 정상 간 교섭대상으로 격상된 셈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월30일 밤 김창석 주나고야 총영사가 이끄는 면접팀이 일본 정부의 주선 하에 김씨 일가족을 만났다. 표면상으로는 의사 확인을 위한 면담이었지만, 사실상 김씨 일가에게 한국행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면담은 조총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바다 위의 해상보안청 순시선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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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씨 일가의 탈출 망명경로
김만철씨 일가가 1월14일 청진항을 탈출 망명한 경로.//(본사자료)1987.2.20(서울= 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밤 10시께 시작된 면담은 이튿날 새벽 3시까지 계속됐다. 면접팀은 김만철 일가에게 한국행을 택할 경우 받게 될 정착금과 직장 교육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이재춘 참사관은 당시 면접팀에게 한국은 누구나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사회라는 점을 강조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5시간여에 걸친 설득에도 일가족의 의견은 쉽게 교통 정리되지 않았다. 김만철씨 본인은 한국행을 원했지만 김씨의 장모와 처남 등은 호주나 뉴질랜드 등 제3국행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으로 갈 경우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처형당할 위험이 있고, 북측이 향후 한국으로 첩자를 보내 보복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는 눈치였다. 일부는 북한에서 받은 사상 교육 탓에 \'남조선은 거지들이 득시글거리는 생지옥\'이라는 편견도 갖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의 고민이 깊어졌다. 한국으로 이들을 직접 보내면 북한이 반발할 테고 호주 등 제3국으로 보냈다가는 한국의 불만을 살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일본이 그대로 떠안고 있자니 제2, 제3의 김만철 행렬이 줄을 이을 것이 자명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일본 외무성은 이튿날 이재춘 참사관을 불러 \'은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일본 정부가 김만철씨 일가족을 불법입국 혐의로 공해상에 강제 추방하는 형태가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외형상으로는 강제추방이었지만 실제로는 청진호를 공해상에 \'의도적으로\' 표류시켜 부산 근처의 한일 인접수역으로 유도한 뒤 대기 중이던 우리 측 함정이 이를 인수하는 구상이었다. \'물길\'을 자연스럽게 이용해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한국에 탈북자들을 넘기는 외교적 해법인 셈이다.

외무성 측은 청진호의 주요 통과 해역을 표시한 해도와 한국 해역 도달 예상 일시까지 주일 한국대사관에 상세히 알려줬다. 계획대로 \'인수인계\'가 이뤄진다면 이번 사건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었다.
이재춘 참사관은 즉각 외무부 본부에 협의결과를 전문 보고하고 "구체적인 인수지점과 일시는 직접 보고하겠다"고 했다. 전화로 보고했다가는 북한에 의해 도청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부로부터 귀국 지시가 떨어지자 이 참사관은 2월1일 아침 부인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행 첫 비행기에 올랐다.

이 참사관이 서울에 도착하자 최광수 외무부 장관은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청와대 바로 옆의 \'궁정동 안가\'였다. 그곳에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력자인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과 이기백 국방부 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자복 합참의장과 최상화 해군 참모총장, 김인기 공군참모총장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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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춘 前 주러시아 대사
(서울=연합뉴스) 정묘정 기자 = 이재춘 전(前) 주러시아 대사가 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만철 일가족 망명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1.11.7myo@yna.co.kr

이 참사관은 국가보안 당국의 수뇌부 앞에서 약 20분간 일본 측과의 교섭 내용을 브리핑했다. 브리핑 중간 중간 장세동 부장은 세세한 부분까지 질문을 던졌고, 그때그때 필요한 조치를 직통전화로 군 수뇌들에게 직접 지시했다.

그날 궁정동 안가 회의는 김만철씨 일가를 인수하기 위한 사실상의 \'군사작전\'이 논의됐던 것이었다. 북한은 북한대로 김만철 일가의 한국 망명 만큼은 저지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탓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경우에 따라 전쟁 상황도 상정하는 분위기였다. 이 참사관은 그날 회의를 마치고 밤늦게 일본으로 돌아왔다.

당시 안가 회의 결과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즉각 전군에는 비상경계령이 발동됐다.

그러나 이튿날인 2월2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 참사관을 외무성으로 불러들인 후지타 기미오(藤田公郎) 외무성 아시아 국장이 김만철 일가의 추방계획 백지화를 통보한 것이다. 청진호가 너무 낡고 엔진도 못 쓰게 돼 더이상 항해를 계속할 수 없게 됐다는 이유였다.

석연치 않은 설명에 이 참사관은 "외무성이 한다는 일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라고 강력히 항의했지만 "정말 미안하게 됐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북한에 억류 중인 후지산마루호 선장에 대한 북측의 살해 위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주일 대사관은 북한이 한일간의 \'공해상 추방계획\'을 눈치 채고 후지산마루호 선장에 대한 살해 위협을 가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본부에 보고했다.

한일 간에는 냉랭한 기류가 감돌기 시작했다. 김씨 일가를 한국으로 데려가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는가 싶은 순간 \'대만행(行)\'이라는 새로운 해법이 등장했다. 당시 대만은 일본과 수교하지 않았지만, 한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일단 김씨 일가를 대만으로 보냈다가 일정기간 이후 한국으로 송환하는 우회적 방법을 쓰자는 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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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씨와 가족들이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1987년 자료사진)

일본은 우리 정부 고위층과 친한 한 \'막후인사\'를 통해 김씨 일행이 대만으로 갈 수 있도록 대만과의 교섭을 우리 정부가 맡아주기를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가의 사람들\'(노진환 저)에 따르면 이 막후인사는 나카소네 수상의 정치 자문역을 맡고 있던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전 이토추 종합상사 회장이었다. 한일 외교사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막후에서 조정 역할을 한 세지마는 베스트셀러 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인 이키 타다시(壹岐正)의 실제 인물로도 유명하다.

어쨌든 정부는 고위층의 지시를 받아 곧바로 대만과의 교섭에 돌입했고 김씨 일가의 망명을 둘러싼 한ㆍ대만 간의 불꽃 튀는 밀고 당기기가 시작됐다. 최광수 외무장관은 추견(鄒堅) 주한 대만대사와 은밀히 접촉해 김씨 일가의 대만행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대만 측은 이를 즉각 거부했다.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부는 김씨 일가가 대만에 도착하면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에 한국으로 데려오겠다며 설득에 총력을 기울였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 신 전 대사와 박수길 외무부 차관보 등이 대만에 급파됐고, 정일권 전 국회의장 등 전직 고위관리들도 총동원돼 장징궈(蔣經國) 대만 총통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에게 전화 공세를 펼쳤다.

우리 측의 전방위적인 설득에 대만 정부는 결국 입장을 선회했다. 김씨 일가의 대만 체류기간을 최대한 단축한다면 대만행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내보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김씨 일가가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으로 보내지면 북한으로부터 \'짜고 쳤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이미 교섭은 한국과 대만 손에 넘어와 있는 상태였다.

드디어 2월7일 밤, 김씨 일가족의 극비 이송작전이 시작됐다. 밤 11시께 김씨 일가 11명을 태우고 공군기지를 이륙한 일본 자위대의 YS-11기는 이튿날 새벽 0시25분께 타이베이의 중정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김씨 일가는 타이베이 교외의 특수기관 전용 초대소로 옮겨 20여 시간을 머문 뒤 2월8일 저녁 8시30분께 대한항공 727기에 탑승해 약 2시간 뒤 한국땅을 밟았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김씨 일가족의 망명극은 24일 만에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김만철 일가의 입국이라는 \'외교적 난제\'를 원활히 풀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일관계가 매우 가까왔기 때문이라는 게 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의 설명이다. 과거사가 여전히 양국관계 진전의 풀리지 않는 족쇄이지만 이를 단칼에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장기적 해결사안과 단기적 대응사안을 분리 대응해 양국관계를 전략적으로 \'관리\'해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게 이 전 대사의 지적이다.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 = 1968년 외무고시 1기로 입부한 뒤 주삿포로 부영사와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주일본 참사관, 주일본 공사 등 일본에 4차례나 근무한 자타공인의 일본통(通)이다.

본부에서도 동북아 1과장과 아주국 심의관, 아주국장 등을 지내며 문세광 사건과 김만철 일가족 망명 사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굵직굵직한 현안이 터질 때마다 대일(對日) 외교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또한 주미 참사관과 주방글라데시 대사, 주EU대표부 대사, 주러시아 대사 등을 역임하며 대륙을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경력을 쌓았다.

퇴임 후에는 춘천의 한림대학교에서 한국외교와 외교사에 대해 강의하며 후학 양성에 기여했으며, 최근에는 35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담은 회고록 \'외교관으로 산다는 것\'을 펴내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71) ▲서울대 법학과 ▲주삿포로 부영사 ▲주일본대사관 1등 서기관 ▲동북아1과장 ▲주미국 참사관 ▲주일본 참사관 ▲아주국장 ▲주방글라데시 대사 ▲제1차관보 ▲주EU대표부 대사 ▲주러시아 대사

저작권자(c)연합뉴스. 2011/11/07 08: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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