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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한중수교때 김일성 '자주노선'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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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1-09-28 10:36 조회4,1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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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한중수교때 김일성 \'자주노선\'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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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한, 중 수교 양국 서명 , 악수(중국 북경 조어대) 1992.8.24 (서울= 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3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본사자료)

권병현 前주중대사 1992년 한중수교 극비교섭 회고
"2∼3년 늦춰달라"던 북한에 큰 충격.."북핵 문제의 서막"

※ 편집자 주(註) = 외교는 \'총성없는 전쟁\'이다. 겉으론 웃고 악수하지만 이면에서는 국익확보를 위해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외교전이 숨가쁘게 전개된다. 자원외교가 걸린 아프리카, 북핵이 초미의 과제인 유엔 무대, 통상현안이 산적한 제네바에서도 지금 이 순간 외교관들은 \'보이지 않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

   64년간 줄달음해온 한국 외교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치열했던 \'전쟁의 기록\'이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세계역사상 전례를 찾기 어려운 발전과 변화를 이룩한 데는 막후에서 작동한 외교의 역할도 컸다. 이 때문에 일선에서 수십 년간 \'산전수전\'을 겪어온 원로외교관 한 사람 한 사람의 경륜과 노하우는 한국외교의 자산이다.

   연합뉴스는 한국외교협회(회장 김용규)와 공동으로 한국 역사를 움직여온 막후 외교전의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하는 \'외교열전\' 연중시리즈를 기획해 격주 단위로 내보낸다. 원로외교관 등과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외교비화를 재구성하고 필요에 따라 일문일답과 해당 외교관의 프로필 등을 실을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정묘정 기자 = 1992년 7월15일 오전 평안북도 묘향산 별장. 평양을 출발한 첸지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김일성 주석의 표정에는 초조감과 착잡함이 묻어났다. 첸 부장이 들고오는 베이징(北京)의 메시지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터였다.

   같은 해 4월15일 양상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이 평양을 다녀간 때가 정확히 석 달 전이었다. 김 주석의 80세 생일 축하행사 참석차 방북한 양 주석은 조심스럽게 "이제는 한국과 관계를 정상화할 때가 가까웠다"고 운을 뗐다. 한중 수교를 추진할 방침임을 처음으로 시사한 발언이었다.

   당황한 김 주석은 일단 양 주석에게 "수교를 적어도 2∼3년만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북미 관계가 새롭게 진전되고 있으니 \'보조\'를 맞춰달라는 취지였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인정하고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교차승인\'(Cross Recognition) 구상을 다급하게 꺼내든 셈이다. 양 주석은 예스(yes)나 노(no)를 하지 않은 채 답변을 얼버무렸고, 이때만 해도 중국을 믿어 의심치 않던 김 주석은 자신의 뜻이 수용된 것으로 확신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불과 석 달 만에 천 부장을 특사로 보내겠다고 전갈을 보내오자 김 주석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북한의 집요한 정보추적에 중국은 철통 보안을 유지했지만 이미 양 주석으로부터 언질을 들은 바 있는 김 주석은 한중 수교와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다.

   묘향산 별장에 당도한 전 부장과 통역 장팅옌(張庭延.초대 주한 중국대사)은 김 주석을 만나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장쩌민(江澤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구두메시지를 낭독했다. 김 주석의 예감대로 한중 수교를 공식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측에 최후통첩한 것이다.

   김 주석은 매우 침통한 표정 속에서 잠시 숙고한 뒤 짤막하게 "우리는 자주노선을 걷겠다. 중국이 하는 일은 중국이,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라고 말했다. 6ㆍ25전쟁을 계기로 \'혈맹\'으로 발전해온 북중 관계를 감안할 때 이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는 중국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우리의 길\'을 걷겠다는 의미로, 중국에 대한 강도 높은 배신감과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그날 첸 부장과 김 주석과의 만남은 전례 없이 짧았고 의례적인 오찬연회조차 열리지 않았다. 첸 부장은 2003년 펴낸 회고록에서 "아마도 중국 대표단이 김 주석을 만난 중에서 가장 짧은 회동"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는 중국이 혈맹관계인 북한으로부터 \'외교적 냉대\'를 당한 것으로, 김 주석이 받은 충격의 강도가 얼마나 컸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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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회고하는 권병현 전 대사
(서울=연합뉴스) 정묘정 기자 = 1992년 한중수교 당시 예비교섭 대표로 활약했던 권병현 전(前) 주중대사. 2011.6.20 myo@yna.co.kr

   김 주석이 중국에 통고한 자주노선 표방은 사실상 북핵 문제의 서막이었다. 구소련 체제가 붕괴된 이후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중국이 남한과 덜컥 수교하는 상황에 처하자 김 주석이 느끼는 외교적 고립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북한은 그때부터 "믿을 것은 핵(核) 뿐"이라는 인식 속에서 핵무기 개발에 사생결단식으로 매달린 것으로 보인다.

   1992년말 남북간 핵협상이 결렬되고 북한이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탈퇴, 1차 핵위기를 촉발시킨 것도 그 기저에는 한중수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북중 관계에 금이 가면서 핵개발이 북한에 유일한 안보적 대안이 된 셈이다.

   이렇듯 동북아 외교질서를 뒤흔든 한중수교를 결정한 이는 바로 중국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혈맹인 북한 김일성 주석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집단지도체제의 \'총의\'로 한중수교를 추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덩샤오핑은 1992년초 "남한과의 수교는 무해양득(無害兩得)이다. 일득(一得)은 중국의 통일에 좋고, 이득(二得)은 중국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며 당과 내각에 한중수교를 비밀리에 추진할 것을 특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덩샤오핑은 그러면서 북한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김일성 주석에게는 사전에 좀 알려라"고 주문했다는 후문이다.

   한중수교는 한마디로 \'정보전\'의 승리였다. 대만과 북한은 각각 자국의 최대우방국인 한국과 중국이 어디에선가 수교를 논의하고 있다는 눈치를 채고 이를 예리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이 고도의 정보망을 동원해 한중수교 움직임을 간파하고 적극적 방해 공작을 펴는 것이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였다.

   덩샤오핑의 특별지시에 따라 비밀교섭을 추진하던 중국측은 북한에도 극비보안을 유지했으나 김일성의 중국내 영향력이 워낙 막강한 터라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교협상에 가담한 한국의 외교관들은 가히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첩보전을 펼쳤다. 당시 국내에서 한중수교 추진 사실을 아는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과 김종휘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외교비서관, 이상옥 외무장관, 김석우 외무부 아주국장 정도였다.

   이상옥 외교장관은 그해 5월6일 한중 수교문제를 논의할 예비교섭 대표로 권병현 외무부 본부대사(외교안보연구원 근무)를 정하고 권 대사에게 이를 정식 통고했다. 이 장관은 권 대사에게 고향 아버님이 병환 중이어서 시골에 가있는 것으로 위장하라고 지시했다. 신정승(주중 대사.2008~2009) 동북아 2과장은 그날로 병가를 내고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가장해 권 대사를 도왔다.

   다음날부터 권 대사와 신 과장은 동빙고동 안가로 배치돼 역사적인 한중수교 비밀회담 실무준비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안기부장과 차장, 차장보도 와있었다. 김석우 아주국장은 밤중에 혼자 차를 몰고 안가에 와서는 권 대사가 준비한 보고서를 장관에게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이 장관은 "집사람에게도 비밀을 엄수하라"고 신신당부했던 터라 교섭대표단은 집안에서조차 입조심했다는 후문이다. 중국 베이징으로 떠나는 권 대사에게 부인이 행선지를 물은 뒤 답이 없자 "그럼 추운 지방이냐, 더운 지방이냐"를 재차 물었는데도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그러자 부인은 여름옷과 겨울옷을 모두 챙겨줬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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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리는 중국과 대만 국기
(서울=연합뉴스) 주한 중국대사관 직원들이 1992년 8월27일 중국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왼쪽). 한.중수교로 철수하게된 대만대사관의 직원들이 1992년 8월24일 오후 대만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내리고 있다(오른쪽).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1.6.20 myo@yna.co.kr

   당시 교섭대표단은 그해 5월13일부터 6월21일까지 베이징과 서울에서 3차례에 걸친 교섭을 갖고 수교원칙을 재확인한 뒤 공동성명 문안을 집중 협의했다. 결국 7월29일 노창희 외무차관이 베이징을 방문해 쉬둔신(徐敦信) 외교부 부부장과 면담, 한중수교 공동성명 문안과 발표날짜를 확정하고 공동성명 합의문에 가서명했다.

   수교협상은 끝났으나 마지막 걸림돌은 대만에 어떤 식으로 사전 통고하느냐였다. 장제스(蔣介石) 총통 시절부터 임시정부 수립과 해외 독립운동, 건국과정에서 많은 빚을 졌던 정부로서는 어떤 해명으로도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단 대만 정부가 한중수교에 따른 충격을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미리 통고해주기로 했으나 그 시점을 언제로 할 것이냐를 놓고는 정부 내에서도 견해가 엇갈렸다.

   당초 권 대사는 한 달 전에 대만에 통보해줄 것을 건의했으나 윗선에서 정보노출 등을 우려해 난색을 보였다. 내부 논의 끝에 정확히 일주일 전에 대만측에 알려주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상옥 장관은 서울 중구 롯데호텔로 진수지(金樹基) 주한 대만대사를 불러 "한중수교가 불가피하다. 협상을 하고 있으며 수교가 가까이 왔다"고 통고했다. 김 대사로부터 충격적 보고를 받은 대만 정부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정부는 대만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한중수교 사실을 대만 정부가 먼저 터뜨리도록 \'배려\'했다. 한중 수교 이틀전인 8월22일 대만의 첸푸(錢復) 외교부장은 한국의 대중국 수교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과 단교한다고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외무부 출입기자단을 상대로 한 첩보전도 숨 막혔다. 당시 출입기자단은 "우리가 모르는 외교기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당시 일부 유력매체들은 한중수교가 추진되고 있는 낌새를 채고 당국자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담당 실무자인 김석우 아주국장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애매모호하게 답변하며 기자들의 예리한 취재공세를 피해 나갔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였지만 결국 국내 언론을 상대로 보안을 유지하는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 권병현 전 주중대사 = 외교부 재직시에는 역사적인 외교 현장을 누비는 모습으로, 퇴임 후에는 네이멍구 사막화 방지에 헌신하는 모습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영원한 외교관\'이다.
1965년 제14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수석합격해 외교부에 입부한 이후 중국과장과 아주국장, 주중대사 등을 거친 대표적인 중국통이다. 주(駐)일본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일본과장을 지냈으며, 주태국 공사와 주미얀마 대사를 역임하는 등 아시아 외교에도 전반적으로 밝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 협상 당시에는 예비교섭 대표로 활약하며 \'007작전\'을 방불케 했던 비밀교섭을 무난하게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를 설립해 한중 청년 교류와 사막 녹화 사업에 앞장서는 민간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말까지 5년간 25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쿠부치 방풍림 조성사업을 이끌어 황사의 주요 발원지인 쿠부치 사막 확대 방지에 크게 기여했다. 이 같은 노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2009년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의 초대 \'지속 가능한 토지관리 챔피언 겸 녹색대사\'로 임명됐다.

   ▲경남 하동(72) ▲서울대 법학과 ▲美 피츠버그대 행정외교대학원 ▲중국과장 ▲주(駐)일본 참사관 ▲일본과장 ▲아주국장 ▲주미얀마 대사 ▲주호주 대사 ▲주중국 대사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 대표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지속 가능한 토지관리 챔피언 겸 녹색대사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6/20 08: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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